설법이야기

[스크랩] 벽지불

JU_LEE 2014. 3. 12. 20:15

집단 수행승의 성문〈聲聞〉과 구분

독선적·소승적인 성자로 여겨

지난주에 벽지불에 관해 언급했지만 조금 더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해볼까 합니다. 벽지불(支佛)이란 말의 한자어는 특별한 뜻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인도의 산스크리트로는 프라티에카붓다(pratyekabuddha), 빠알리어로는 빠쩨까붓다(paccekabuddha)를 소리 나는 대로 옮긴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 벽지불의 뜻을 나까무라 하지메의 <불교어대사전>(1144쪽)에서 설명하는 내용으로 정리해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이 말의 원뜻은 ‘고독한 붓다’이다.

둘째, 독각(獨覺), 연각(緣覺)의 뜻으로 한역한다.

셋째, 덧없음(無常)을 관찰하고 세속을 떠나 홀로 숲에서 수행하는 수행자로서, 자이나교에서도 파테야붓다(patteyabuddha)라는 이름의 홀로 수행하는 사람이 있었고, 이런 사상이 불교에도 계승된 것으로 보이며, 숫타니파타 등에서 등장하고 있는 수행자들은 바로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다.

넷째, 훗날 정사에서 집단생활을 하는 수행승들이 출현하고 그들을 성문(聲聞)이라 부르면서 벽지불과는 다른 유형을 보이게 되었다.

다섯째,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벽지불이란 붓다 없는 시대에 나와서 고요한 것을 좋아하는 성품을 지녔으며 낙엽지고 꽃이 떨어지는 광경을 보고 덧없음을 절감한 뒤에 스승이나 도반 없이 깨달음을 얻은 성자다.

여섯째, 스승이나 도반 없이 홀로 지내고 홀로 다니며 대중을 위해 열심히 법문을 설해주지도 않고 혼자 진리의 즐거움에 젖어 지내기 때문에 때로는 독선적이거나 소승적인 성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일곱째, 연각(緣覺)이라고도 한역되고 있는데, 연각에 대해서는 “십이인연법을 관찰하거나 혹은 다른 연(緣)에 의해서 깨달았다”, “인연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라는 설명도 있지만 이 내용은 후대 해석이 덧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전의 해설에 <대지도론>제18권의 설명을 덧붙인다면 여덟째, 벽지불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인연각’과 ‘독각’이다. 인연각(因緣覺)이란 지난주에 설명했듯이 특별한 가르침을 따로 받지 않아도 숲의 나무가 훼손되는 광경을 보고도 덧없음을 절감해서 세속을 떠나 수행에 전념하여 깨달음을 이루는 성자로서, “전생의 복덕과 원행(願行)의 과보로 금생에 조그마한 인연을 보고 도를 이루었기 때문”에 인연각이라 부른다.

아홉째, 독각(獨覺)이란, 역시 말 그대로 “이번 생에 깨달음을 이루지만 다른 이의 가르침을 듣고 따라서 그리 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은 것이니 이것을 이름 하여 독각벽지가불(獨覺支迦佛)”이라 부른다.

열째, 독각에 다시 두 종류가 있으니 큰 벽지불과 작은 벽지불이다. 먼저 작은 벽지불은 위에서 설명한 내용 그대로이며, 일곱 생을 윤회하였고 이번 생이 윤회하는 마지막 삶이며, 스스로 도를 이룬 자이다. 반면 큰 벽지불은 일백 겁 동안에 공덕을 지어서 지혜가 불어났고 32상을 얻었는데, 간혹 32상을 전부 다 못 갖출 수도 있으며, 아라한 가운데 지혜가 예리하고 뛰어나며 모든 깊은 이치를 능히 깨쳤고, 오랫동안 정을 닦고 익혀 언제나 홀로 머물기를 좋아한다. 이런 특징으로 인해 큰 벽지불이라 이름 한다.’

벽지불의 내용은 이상과 같습니다. 살펴보면, 깨달음의 내용에서 성문이나 보살과 크게 차이가 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불도를 구하는 자는 처음 구도의 뜻을 낼 때부터 “모쪼록 부처가 되어 모든 중생들을 해탈로 인도하겠습니다”라는 원을 일으키니, 이웃을 돕겠다는 서원의 내용은 미미할지 몰라도 그 서원이 훗날 부처냐 벽지불이냐 하는 잣대가 된다는 것이 <대지도론>의 설명입니다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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