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가라 앉즌 흙탕물은 더 지켜봐야 한다
수없는 갈림길서
혼자 돌파하는 건 위험
냉철하게 점검하는 힘
수행으로 가능해 …
일반적 윤리개념과
종교적 윤리개념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스스로가 쉬운 입장 돼
‘지혜의 눈’을
좀 더 쉽게 뜨게 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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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수불스님은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가 지난 3월19일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210호 영원홀에서 개최한 ‘젊은 날의 화두-생사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주제 강연을 통해 선(禪)에 대한 이해도를 한층 높였다. |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는 지난 3월19일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210호 영원홀에서 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수불스님 초청 강연회를 개최했다. ‘젊은 날의 화두-생사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주제로 열린 특강에서 수불스님은 2시간 동안 10여명의 청중으로부터 질의를 받고 곧바로 답해주는 즉문즉답을 진행했다. 스님의 특강에 이은 즉문즉답은 서울대 철학과 조은수 교수가 진행했다.
먼저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던지겠다. 여러분은 ‘스스로 자기 눈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청중 중에 ‘마음으로 본다’는 답변이 나옴) 대개 어떻게 보느냐는 질의에 ‘마음으로’라는 답을 내놓는다. 불교의 영향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마음이 보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보지 않는다면 과연 무엇인가.
질문을 하나 더 던진다. ‘자기 눈을 자기가 볼 수 있느냐?’ 실제로는 이미 보여 지기 때문에 보여 지는 것이고,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내 눈으로 봤기에 보여 지는 것이다. 맹인은 손으로 몸으로 느끼는 것이고, 이 차이는 서로 업이 다르다고 말한다. 이런 입장에서 마음을 보자. 눈뜨고 죽은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 눈으로 보게 하니까 볼 수 있는 것이다. 생각이 생각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란 정체는 깨닫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생명을 추구하는 것,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젊은 날에 고민을 많이 했다. ‘나는 누구일까’는 힌두교식 수행방식이다. 불교의 선(禪)에서는 ‘나는 누구일까’가 아니라 ‘모른다’는 사실에 주목해, 그런 의도를 취하는 것이다. 그것이 선불교의 입장이다.
종교가 만들어진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종교 이전에는 철학적 가치가 사회를 지배했고, 또 다른 차원에서 주술과 신화가 있었다. 종교는 공개된 비밀이다. 종교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종교는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종교 안에 우상을 타파할 힘이 있다. 굳이 종교에 빠져서 어리석음으로 갈 필요가 없다. 제대로 된 종교의 가치관은 가는 길을 안내하는 것이지만, 이를 제대로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쉽지 않다. 종교를 거치지 않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길을 철학이 갖고 있다고 말을 하지만, 생명체에 대한 생각에서 ‘있고 없고’라는 영역이 종교를 믿게 하는 수단이 된다. 사회사상, 사회윤리 등 개념이 추가되더라도 일반적인 개념과 종교적 개념에는 차이가 있다. 종교를 통해 지혜에 눈 뜨는 것이 쉬워진다.
그런데 종교를 믿게 하려는 수단으로 종교학, 종교이념 등이 생겨났으나, 여기에 물들면서 우리 사회가 희생되고 힘들어졌다. 이제 좀 더 생산적 안목으로 변화해서 길 안내를 잘 했느냐를 봐야 한다. 궁극적으로 종교윤리, 종교사업, 종교의식, 이런 영역은 종교를 잘 믿게 하기위한 수단이지 종교 그 자체는 아니다. 오히려 선의 입장에서 정상적으로 길안내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종교를 위해 종교생활을 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철학을 위해 철학사상을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지혜의 눈’을 뜨면 정신적으로 종교가 선(善)도 진리고 악(惡)도 진리임을 알게 된다. 어떤 것도 진리를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이런 순수함이 영원함이다. 이론적 근거도 제시하면서 실질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선불교의 시작이다. 어리석음으로 지혜로움을 이어갈 수 없다. 어렸을 적 생사문제를 머리와 가슴으로 몰두했을 때 갑갑함을 느꼈었다. 젊은 날 나의 화두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때 헛된 노력을 해서는 안 된다, 실질적 노력을 통해 내가 스스로가 변해야 한다. 그렇게 자신이 변하기 위해서는 좋은 스승을 먼저 만나야 한다. 본인 혼자해서는 안 된다.
선가(禪家)의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動靜)이라는 말을 잘 알고 앉아 있어야 참선을 잘한다고 할 수 있다. 참선은 눈앞에 정신적 벽이 있음을 알고 자신이 이를 검증하는 과정이다. 숙제를 갖고 풀어야 학업이 되고, 이는 누구나 풀 수 있다. 정신적 벽을 마주할 수 있는 인연을 만났을 때, 자신을 압박하는 고민을 하게 된다. 젊은 날 스스로 그런 고민을 유도하고 생사를 걸어 놓고 고민하는 과정을 거쳐본 경험이 있다.
여러분이 그런 입장에 처한다면, 생각을 내려놔라고 말해주고 싶다. 생각이 일어나면 그대로 내려놔야한다. 잠시라도 그대로 놔두면 마음이 쉬워진다. 육신도 깜박 졸면서 졸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보약이다. 늘 깨어 있으려면 힘들기 때문에 그렇다. 잠을 자면서 자연스레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것, 선을 하게 되면 그 방법을 알려준다. 그렇지만 그 방식을 몇 번 사용해서 육신이 편안해지면 그것도 독이 된다.
우리는 앉아서 잠깐 졸다가 깨면 개운해진다. 마찬가지로 공부라는 망상을 갖고 공부에 들어가면 졸게 마련이다. 원래 잠을 이기는 장사는 없다. 그래서 수행의 적은 잠이라고 말한다. 종교를 수단화할 수 있는 기회와 인연들을 좀 더 가깝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지혜의 눈을 좀 더 쉽게 뜨게 될 것이다. 일반적 윤리개념과 종교적 윤리개념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스스로가 쉬운 입장이 된다.
살아오면서
화난 일은 없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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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바로 잡을 수 있다면
화를 내야 한다
즉문즉답
학생 : ‘마음이 무엇인가’ 답해 달라.
스님 : 마음은 허공과 같이 모습이 없으나 허공은 만들 수 있는 힘이 없으며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직접 체험을 해봐야 한다. 논리적 이론에 의해 접근할수록 힘들다. 이치로 따질 수 없는 것이라서, 이러한 한계를 넘기 위해서 수행이 필요하다.
일반인 : 거울에 자기를 비춰보면서 거울에 나타난 자기는 자기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스님 : 거울에 나타난 자기가 허상이라서가 아니다. 본래 무(無)라는 것은 개념이라서 고정 관념에 두고 얘기하기가 어렵다. 불교와 철학은 구별이 있다.
학생 : 스님의 말씀에, 진리의 본질은 선악을 다 포용하지만, 선악에 물들여지지는 않는 것이다. 진리 속에는 선도 존재하고 악도 존재한다. 선(善) 속에는 진리가 존재하고 악(惡) 속에는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더 많은 지식이 필요한 과학에서 옳고 그름에 대한 구분은 어떻게 하나.
스님 : 부처님께서 사람은 똑같으나 눈높이가 다르다고 했다. 정신적 영역이 같더라도 입장이 달라지고, 같은 말도 다르게 듣게 된다. 불교는 유무(有無)를 초월하는 것이다. 선어록에 대한 공부에서 고마움을 느끼는 것은 자기 나름의 시비를 떠나서 사물을 보는 것이다.
학생 : 화두를 받아봤다. (그런데) 답답하기도 해서…. 이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스님 : 의사 없이 병이 나으려는 노력은 필요하나 좋은 의사를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곧 좋은 스승을 만나면 화두가 자기도 모르게 들어진다. 제대로 된 한의사를 만나 침 한방에 병이 나은 일화와 같다. 정신적 벽에 딱 막히면 갈림길에 직면하게 되는 것과 같다. 수없이 직면하는 갈림길을 혼자서 돌파하는 것은 위험하다. 눈 밝은 선지식을 찾아가 제대로 된 화두인지를 물어보고 나면 공부에 진전이 있게 된다.
학생 : 수행체계가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다. 아잔브람 스님과의 대화에서 스님은 선불교와 테라바다와 접목을 언급했다.
스님 : 남방의 수행법인 테라바다는 수행에 집착하게 만드는 수행으로, 수행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라 본다. 원만한 수행을 하면 수행자인지 아닌지를 구분하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워진다. 부처님도 ‘너 수행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남방불교의 수행은 흙탕물을 가라앉히는 것이라고 비유할 수 있는데, 조용히 있을 때는 가라앉힌 흙탕물 위에 맑은 것이 유지되나, 복잡하거나 시끄러운 밖에서 흔들면 다시 흙탕물이 일어난다. 북방불교의 수행은 아예 가라앉은 것까지 흔들어서 뽑아 없애는 것으로, 처음부터 가라앉은 것을 더 흔들어서 흙탕물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원래 일하며 공부할 수 있는 것이 북방불교 수행이다. 북방은 추운 겨울을 나야하기 때문에 수행자라고 일을 하지 않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남방은 의식주가 해결됐다. 남방과 북방의 차이는 엄청나다. 흙탕물이 더욱 일어나게 만드는 것에서 간화선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교수(자연과학대) : 모르는 것을 채워 가는 것과 덜어내는 것 양자 간에 충돌이 있다. 화두 방식은 덜어나가는 것이냐 더해가는 것이냐.
스님 : 인연 따라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는 것이 선을 역사적으로 고증한 방법이다. 선을 직접 체험한 입장에서 하지 않은 사람과 거리가 있다. 과학자 케플러가 고민 속에 해변을 걷다가 깨달음으로 새 이론에 접근했던 것이 예가 된다. 종교를 안 믿어도 정신세계가 열리면서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다. 해오던 학문을 지속하면서, 고민해오던 것을 화두를 들고 수행으로 보면 입장 차이가 있다. 변화하고 발전하는 의지 속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라서, 제대로 된 수행을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짧은 기간에도 가능하고 10일 안팎에서 할 수도 있다. 체험을 하고 난 뒤에, 그 체험이 뭘 뜻하는 것이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학생 : 살아오면서 화난 일은 없었나. 화를 가라앉히는 방법은 있나.
스님 : 나는 화가 잘 안 난다. 화를 내는 척은 해봤다. 화를 내서 남을 다치게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고 통제가 안 되는 것이다. 완벽하다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성낼 분위기를 가져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판단할 지혜로운 눈이 필요하다. 돌이켜 냉철하게 돌아보고 점검하는 힘이 필요하고 이는 수행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꼭 화를 내어야 할 때는 화를 내야 한다. 화를 냄으로서 잘못될 일을 바로 잡을 수 있다면 화를 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