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참 니를 알라
수행은 찾아가는 과정일 뿐
얻거나 만드는 과정 아니다
본문 : 도는 본래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어 닦아 증득하는 것이 아니다. 도는 소리나 형상이 아니어서 미묘하여 보기 어렵다. 마치 사람이 물을 마시면 차고 더운 것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아 다른 사람에게 결코 말할 수 없다. 오직 여래만이 알 수 있고 그 밖의 인간이나 하늘 등의 무리들은 도무지 깨닫지도 알지도 못한다. 범부는 지혜가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형상에 집착한다. 자기의 마음이 본래 공적한 줄을 알지 못하고 망령되이 형상과 온갖 법에 집착하면 곧 외도의 무리에 떨어지리라.
해설 : 도(참 나)는 본래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다. 수행은 ‘참 나’를 찾아가는 과정일 뿐 얻거나 만드는 과정이 아니다. 수행, 기도, 소리와 형상, 감각과 언어 이 모두는 참 나에 비친 대상들일 뿐 참 나가 아니다. 부처는 삼라만상이 모두 참 나이지만 무명의 중생은 그 무엇으로도 참 나를 표현할 수 없다. 표현하면 이미 대상이기 때문이다. 오직 참 나를 깨달은 여래만이 알 수 있다. 어리석은 중생들은 주체인 참 나를 모르고 대상에 집착하여 생사윤회의 고통에 떨어지니 바로 외도의 모습이요 마의 행위이다.
본문 : 모든 법이 마음에서 생긴 것임을 알면 집착이 있을 수 없나니 집착하면 알지 못한다. 만일 근본 성품을 보면 12부경이 모두가 부질없는 문자이다. 많은 경전과 논소가 오직 마음을 밝혔을 뿐이니 말끝에 계합해 알면 교법이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지극한 진리는 말을 떠났고 교법은 말씀일 뿐이니 진리도 도가 아니다. 도는 본래 말이 없으므로 말은 허망한 것일 뿐이다.
해설 : 일체 모든 법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 우리의 마음(참 나)임을 밝히고 그 참 나를 찾아가는 방법을 제시해 놓은 것이다. 법은 목적지 참 나를 깨달아가는 방법일 뿐이니 참 나를 깨닫고 나면 불필요하고 목적으로 삼아 집착하면 참 나를 깨달을 수 없다. 불교의 경, 율, 론 삼장이 모두 방법이요 설명일 뿐이다. 참 나는 언설로 표현할 수 없다. 언설은 마음(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한 생각이 일어나면 이미 주체가 아닌 주체인 참 나에 비친 대상일 뿐이다.
본문 : 꿈에 누각이나 궁전이나 코끼리나 말의 무리나 나무, 숲, 못, 정자 등의 모습을 보거든 잠시 한 생각이라도 집착하는 생각을 내지 말라. 이 모두가 망념을 의탁해 생겨난 것이므로 반드시 주의해야 한다.
해설 : 꿈은 현재 이전에 안, 이, 비, 설, 신, 의 감각기관을 통해 경험되어지고 저장되어진 의식의 작용이다. 의(意)는 집착과 분별이요, 식(識)은 정보이다. 꿈속에서 어떤 모습을 보든 말 그대로 꿈일 뿐이다. 어리석은 중생들은 꿈속의 모습이나 느낌을 통해 현재와 미래의 삶을 유추하려고 한다. 간혹 현재의 모습과 미래를 예시하지만 이 모두가 자신의 업식일 뿐이다. 과거의 업식이든 현재의 실제이든 미래의 예측이든 모두가 참 나에 비친 업식의 환영이다. 과거의 업식이 집착에 의해 나타난 것이 현재이고 육근, 육경, 육식을 통해 새롭게 재구성되어지는 업식이 표현되어지는 것이 미래이다. 꿈에 집착함은 환영을 집착해 또 다른 환영을 만들 뿐이다.
본문 : 임종할 때에 전혀 형상을 취하지 않으면 의혹을 제거할 수 있다. 털끝만큼이라도 망념을 일으키면 마의 경계에 포섭되리라. 법신은 본래 청정하여 받는 일이 없지만 미혹한 까닭에 깨닫지도 알지도 못한다. 이러한 까닭에 망령되이 과보를 받아 즐기고 집착하여 자유롭지 못하다.
해설 : 중생들의 삶은 참 나를 모르고 참 나에 비친 업식의 환영을 집착하여 실체로 여겨 쉼 없이 구하는 것이다. 이 몸이 환영인 줄 모르고 집착하다 노, 병, 사를 통해 잃게 되면 자신이 집착한 업식에 의해 다시 구하여 집착하게 되는데 이것이 윤회이다. 태어나고 병들고 늙고 죽고 살아가고 알고 기억하고 잃고 얻고 분별하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등등 이 모든 것은 업식의 작용일 뿐 이 작용의 주체인 참 나와는 무관하다. 참 나는 텅 비어 비추어서 나타내서 알게 할 뿐이다. 바로 알아 집착하지 않으면 해탈, 열반이요 집착하여 구하면 생사윤회이니 속박이요 마의 끄달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