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마음의 작용은 참 나의 업식 환영일 뿐이다
과거 기억, 육근 정보 비교해 느껴
참나는 정보를 비추어 알게 할 뿐
본문 : 마음으로부터 말하고 분별하고 운동하고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 모두가 마음의 움직임이며 움직임의 작용이다. 움직임이란 마음의 움직임이요 움직임 그대로가 작용이니 움직임과 작용 이외의 마음이 없고 마음 밖에는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다. 움직임은 마음이 아니요 마음은 움직이지 않나니 움직임이란 본래 마음이 없고 마음이란 본래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다. 움직임은 마음을 여의지 않았고 마음은 움직임을 여의지 않았으니 마음에는 여윈다는 것도 여의었다는 것도 없으며 마음에는 움직인다는 것도 움직였다는 것도 없다.
해설 : 말하고 분별하고 움직이고 보고 듣고 아는 것. 이 모두는 마음의 작용이다. 말하고 분별하고 움직이고자 하는 마음을 생각과 언어와 육신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 이것 또한 마음의 모습이요 작용이다. 감각기관(육근)을 통하여 들어온 정보를 과거에 기억된 정보와 비교 분석해서 느끼고 알고 기억하는 것이다. 이 모두가 마음의 움직임이요 마음의 작용이다. 그러나 자세히 성찰해보면 마음은 새로운 정보, 느낌, 과거의 정보 등이 참나에 비추어져 아는 것일 뿐임을 알게 된다. 움직인다는 것은 움직이고자 하는 내 마음, 움직임을 알 수 있는 감각정보(내 몸, 공간, 시간)가 변해 가는 것을 비추어 아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알고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 움직이는 모든 것이 마음의 작용이지만 참나는 아니다. 참나는 단지 정보(업식)를 비추어 알게 할 뿐이다. 참나에는 움직임도 움직이지 않음도 마음도 육신도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있다, 없다도 없다. 다만 이 모든 것(업식, 정보)을 비추어 알 뿐이다.
본문 : 이는 마음의 작용과 작용한 것이며 마음의 움직임과 움직인 것이니 마음 그대로의 작용과 작용한 것이며 마음 그대로의 움직임과 움직인 것이다. 작용은 바로 마음의 작용이지만 움직임도 아니요 작용도 아니다. 작용의 자체는 본래 공적하여 공은 본래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다. 움직임과 작용은 마음과 같은 것이지만 마음에는 움직임이 없다. 그러므로 경에 말하기를 “움직이되 움직이는 바가 없다”하니 종일토록 오고가되 가고 온 적이 없고 종일토록 보되 본 적이 없고 종일토록 웃되 웃은 적이 없고 종일토록 기뻐하되 기뻐한 적이 없고 종일토록 다니되 다닌 적이 없고 종일토록 멈추었으되 멈춘 적이 없느리라.
해설 : 우리 중생의 마음은 참나(자성)의 바탕에 ‘나’라는 환영을 만들고 그 ‘나’라는 환영이 집착하는 육신을 통해 삼라만상을 보고 듣고 느끼고 알게 된다. 가장 어리석은 중생은 보고 느끼는 대상이 내 몸 밖에 실체한다 착각하여 집착하고 구하게 된다. 조금 지혜 있는 자는 그 모든 것이 내 마음, 정보(업식)임을 안다. 참다운 지혜인은 그 ‘나’라는 것이 이 모두를 비추어 알고 느끼는 참나에 비춰진 또 하나의 환영임을 알고 집착하지 않는다. 마음의 작용과 움직임은 바로 참나에 비친 나라는 환영을 통해서 견문각지 하는 작용과 내 마음이 대상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작용한 것과 움직인 것은 내 마음에 비친 대상(정보, 업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 모두가 내 마음의 작용이다. 그러나 참나는 텅 비어 밝게 비출 뿐이다. 움직이다, 멈추다, 집착하다, 내려놓다, 울고 웃고 오고 가고 기쁨, 슬픔, 이 모두는 참나의 바탕 위에 나라는 환영에 비친 대상의 정보(업식)일 뿐이다.
본문 : 그러므로 경에 말하기를 “말로써 표현한 길이 끊어졌고 마음으로 분별할 자리가 없다”하니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 본래가 원적한지라 성나고 기쁘고 가렵고 아픔이 어찌 본래의 사람과 다르리오. 더욱 미루어 찾아보건데 아픔과 가려움을 찾을 수 없다.
해설 : 말로써 표현 할 수 없고 마음과 행위가 없어진 자리라는 것이다. 즉 모든 표현 수단 이전의 근본바탕이요 대상이 아닌 주체인 것이다. 텅 비어 있는 그 상태를 방편으로 참나라고 표현할 뿐이다. 참나에서 비추어보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참나에 비친 업식일 뿐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