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단번에 깨달은 가르침
법문 : 생멸심(生滅心)의 원리를 제대로 알면 어떤 순간을 맞더라도 괴로움이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유식(唯識)의 원성실성(圓成實性)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개념에 비춰 설명하면 이렇다. 새끼를 뱀으로 잘못 보는 예를 많이 드는데 새끼를 새끼로 보는 것이 원성실성이다.
원성실성은 본래 불성, 부족함 없는 공덕의 장이다. 새끼를 뱀으로 본 것이 변계소집성이다. 변계소집성이 일어나는 이유는 의타기성을 몰라서다. 새끼를 뱀으로 본다고 해서 새끼가 뱀이 되지 않는다.
새끼를 뱀으로 보고 무서워 근처를 가지 못하나 그것이 사실은 새끼라는 것을 알고 나면 무서움이 없어진다. 마음 자리도 그와 같다. 스승에게 야단맞고 화를 삭히러 갔던 상좌는 어떻게 화를 풀었을 까? 의타기를 생각했을 것이다.
뿌리 뽑아내지 않고 적당히 덮어두면
경계 올때마다 흔들리고 고통 받아
본래 자성이 없는데 화는 어디에서 왔을까? 여기서 두 가지 길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경계가 왔을 때 곧바로 경계가 연생연멸에 의한 작용임을 아는 것이다. 이를 승가에서는 ‘청정법신불에 공양 올리려면, 뜨거울 때 올려야지 식은 밥을 올리려 하느냐’는 말로 깨우쳐 준다.
경계가 닥친 바로 그 자리에서 이를 알아채라는 말이다. 경계에 집착하거나 속지 않고 바로 잡으면 법신불에 바로 공양을 올리는 것이다. 또 하나는 성내면 나만 손해다 해서 화를 가라앉히는 방법이 있다. 뿌리를 확 뽑아내는 근기는 없고 ‘에고심’으로 뿌리를 적당히 덮어 두는 방식인 것이다. 그러면 경계가 올 때마다 고통을 당하게 한다.
또 중요한 것은 발심과 원력이다. 발심할 때 세운 원력을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반드시 성취하겠다는 금강같이 굳게 세우고 선지식을 만나 법문을 듣는 것이 심지 법문이다. 학문은 강사에게서 배우고, 선사에게는 심지를 들어야 한다. 그래야 마음 평수가 넓어지고 마음이 아주 대용(大用)이 된다. 어떻게 해야 대용이 되는가? 발심자의 원력에 달려있다.
선지식 은사 스님을 부처님으로 생각하면 자기 법신불에 바로 공양을 올리는 부처의 공덕을 입는 것이고 선지식이나 은사를 친구나 부처님과 같이 생각하지 않고 가벼이 여기면 그 정도에 머물고 만다. 아무리 훌륭한 은사나 선지식을 만나 법문을 들어도 그냥 싫어하고 좋아하고 괴로워하는 인간관계에만 매이면 그 정도 관계에 그치고 만다. 그래서 발심자의 원력과 신심이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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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식을 만나서 선지식으로부터 대승의 깊은 심법을 듣고 배우는 것이 심지법문이라고 했다. 스스로 발심이 청정하지 못하면 밖의 스승이 좋은 가르침을 줘도 와 닿지를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 발심 종자를 일으켜 자꾸 기운을 돋우어야 한다.
그리고 발심은 경계 때마다 계속 해야 한다. 첫번째 발심은 경계가 부딪힐 때 마다 생멸심을 꼭 항복받아야겠다고 발심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명이 끊어지더라도 원력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발심이다. 세번째는 경계로 인해 넘어지고 과거의 습과 업에 의해 넘어지더라도 일어나 그 길을 또 가야 한다는 불퇴전의 용맹을 내는 것이다.
이러한 거듭되는 발심과 원력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지점은 어디인가? 보살의 무주상보시다. 내가 금생에 생명이 작용하는 동안 모든 인연들에게 오직 보살의 무주상보시로 살겠다, 금생 뿐만 아니라 세세생생 그와 같이 하겠다, 이것이 바로 다음 세계 부처로 태어난다는 일생보처(一生補處)의 원이다.
수행자들은 명심해야 한다. 세속인들이 하는 불교공부와 스님들 공부는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스님들은 불교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근본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불문에 들어 왔다. 그러므로 정법에 대해 깊이 거듭 성찰하고 사유하고 자기를 끊임없이 채찍질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