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법이야기

[스크랩] 단 한 마디에 깨우처야 한다

JU_LEE 2014. 9. 24. 13:54

 

간절한 보살심 없으면 선지식도 허사

정견 모르고 염송하면 앵무새와 같아

본문: 若者悟者 不假外善知識 若取外求善知識 望得解脫 無有是處 識自心內善知識 卽得解脫

若者心邪迷 妄念顚倒 外善知識 卽有敎授 不得自悟 當起般若觀照 刹那間 妄念俱滅 卽是自眞正善知識 一悟卽知佛也

 

해설: “만약 스스로 깨달은 이는 밖으로 선지식에 의지하지 않으며 밖으로 선지식을 구하여 해탈 얻기를 바란다면 옳지 않나니, 자기 마음 속의 선지식을 알면 바로 해탈을 얻느니라. 만약 자기 마음이 삿되고 미혹하여 망념으로 전도되면 밖의 선지식이 가르쳐 준다 하여도 스스로 깨닫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반야의 관조(觀照)를 일으켜야 하나니, 잠깐 사이에 망념이 다 없어지면 이것이 바로 자기의 참 선지식이며, 한번 깨달음에 곧 부처를 아느니라.”

 

법문: <육조단경>은 돈교법이다. ‘반야바라밀’과 같은 말이다. 반야는 고요한 것과 비추는 것이 있다고 했다. 고요한 것과 비추는 것을 신회하택 스님은 공적영지(空寂靈知)라고 했으며 <육조단경>에서는 정혜일치(定慧一體)라고 정리했다.

고요함은 정이고 비추는 것이 혜다. 둘은 분리될 수 없다. 마음을 어떻게 떼어놓을 수 있으며 허공을 어떻게 가를 수가 있겠는가? 그와 같은 이치다. 육조의 정혜, 신회의 공적영지를 풀어쓰면 모든 경계는 인연에 의해 인연 조건에 의해 잠깐 일어나는 즉 연생(緣生)하는 거품과 같아 인연이 다하면 멸한다. 그래서 연생연멸(緣生緣滅)이다. 이를 육조는 간단하게 정혜일치라 했고, <반야심경>에서는 ‘색즉시공 공즉시색’, 신회는 공적영지라고 했다. 선지식이 알려줄 수 있는 것은 이 이상은 없다.

중요한 것은 결국 보살심 발심으로 내가 수행하고 있느냐다. 그래서 <단경>에서는 마음 안에 간절한 원력과 발심이 있으면 밖에서 정법의 법문을 들었을 때 바로 깨친다고 했다. 그것이 육조의 선사상이다. 그런데 우리 모습은 어떠한가. 육조는 오조 홍인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한 마디에 곧바로 깨쳤다고 하는데 매일 염송하고 듣는 우리는 왜 아무런 변화가 없는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이런 고민을 해야 한다.

같은 말을 하는데 육조 스님은 깨쳤는데 여러분은 왜 깨치지 못하느냐. 육조가 홀어머니를 뒤로 두고 출가했을 때 그 마음이 얼마나 크고 깊었겠는가. 그래서 디딜방아를 딛으며 오로지 ‘이 마음이 무엇이길래’ 이 마음에 끄달리는가. 수없는 전생동안 뱀 몸도 받고 두더지 몸도 받았는데 천만다행으로 ‘이제 사람 몸 받았으니 이 생에 반드시 도를 깨쳐야 한다는 그 마음이 사무쳤기 때문에 언하(言下)에 깨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마음을 내려면 정견을 세우는 법문을 집중적으로 듣고 깊이 사유하면서 자생력을 길러야 한다. 반복해서 강조하지만 정견을 제대로 세워야 한다. 우리는 마음을 자꾸 ‘좋은 마음’ ‘나쁜 마음’ 등으로 양변에 서있다 보니 정견이 보이지 않는다.

마음이란 파도와 물의 관계다. 파도나 거품이나 모두 물이다. 똑같은 마음이다. 연생연멸이고 자성이 없으며 붙들래야 붙들 수 없는 것이 마음이다. 이런 정견을 제대로 모르고 경을 외우는 데만 집중하면 앵무새와 다름없다. 앵무새가 하루 종일 ‘안녕하세요’하고 외우지만 그 뜻을 모르는 것처럼, 아무런 뜻도 모르고 깊이 사유도 하지 않으면서 무작정 외우는 식으로의 공부로는 아무리 선지식이 선법문을 들려준다해도 헛된 수고에 그칠 뿐이다.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