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아무 생각 없는 것이 좌선이 아니다
안으로는 본래 진성 잘 비추며
일상 생활에 잘 쓰는 것이 ‘선’
본문 : 莫百物不思 常令念絶 卽是法縛 卽名邊見
悟無念法者 萬法盡通 悟無念法者 見諸佛境界 悟無念頓法者 旨佛位地
善知識 後代得吾法者 常見吾法身 不離汝左右 善知識 將此頓敎法門 同見同行 發願受持 如事佛故 終身受持而不退者 欲入聖位
해석 : “온갖 사물을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항상 생각이 끊어지도록 하지 말지니, 이는 곧 법에 묶임(法縛)이니 곧 변견(邊見)이라고 하느니라. 무념법을 깨달은 이는 만법에 다 통달하고, 무념법을 깨달은 이는 모든 부처의 경계를 보며, 무념의 돈법을 깨달은 이는 부처의 지위에 이르니라. 선지식들이여, 뒷 세상에 나의 법을 얻는 이는 항상 나의 법신이 그대의 좌우를 떠나지 않음을 보리라. 선지식들이여, 이 돈교의 법문을 가지고 같이 보고 같이 행하여 소원을 세우고 받아 지니되 부처님 섬기듯이 하고 종신토록 받아 지녀 물러나지 않는 사람은 성인의 지위에 들어가고자 하느니라.”
법문 : ‘온갖 사물을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라’고 했다. 무념 무심이라는 것은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서 생각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항상 경계를 접하며 흐른다. 그 경계를 접할 적 마다 연생연멸(緣生緣滅)임을 알고 기쁨도 슬픔도 화나는 것도 아닌 청정무구한 본심, 본성을 잘 관하는 것이 무념이며 무심이다. 육조스님은 지혜로 관하라고 했다. 지혜는 반야이고 반야는 정혜(定慧)라고 육조는 정리했다. 정은 움직이지 아니하는 것, 경계에 동요하지 않는 것이다. 왜 동요하지 않는가?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마음 바탕 자리가 고요하다. 고요한 그 본성이 몸짓을 하고자 하고 활동하고자 움직이고자 하는 속성이 있다. 그 속성은 상대성을 벗어난 즉 있다 없다는 팔풍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 그것을 우리는 지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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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법문이 분석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견을 세우고 이해하고 믿게 하기 위해서는 설명이 자꾸 들어간다. 생각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을 누르는 것을 무념이라 생각하면 안된다. 그래서 숲에 가만히 앉아서 정(定)에 든 사리불을 보고 유마거사가 나무란다.
유마가 “그대여 거기서 무엇 하는가” 하니 사리불이 “좌선하고 있습니다”고 답한다. 그러자 유마가 좌선은 진정 어떤 것이냐고 묻지만 사리불은 대답을 못했다. 유마거사는 이렇게 말했다. “몸이 삼계에 놀아도 모든 경계에 걸리지 않고 중생의 몸을 벗어나지 않고 마음은 모든 경계에서 초탈한 무심 세계가 좌선이다”
육조는 ‘마음이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속지 않고 경계로 인해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 것’을 좌(座), ‘안으로 항상 본래 자기의 본성 진성을 항상 관하고 성성히 깨어 있는 것’을 선(禪)이라고 했다. 육조의 정의에 비추면 우리가 보통 좌선을 가부좌 틀고 앉는 것으로 여기는 것과는 다름을 알 수있다. 자각선사의 말에 의하면 이 역시 맞는 풀이이지만 궁극적으로 경계를 접해도 경계에 속지 아니하고 동요하지 않는 것이 좌이고, 안으로는 본래 진성을 잘 비추면서 일상생활에 잘 쓰는 것을 선이라는 점을 명심해야한다.
그 이치를 알면 가만히 앉아서 고요만 지키겠다고 억누르고 인위조작으로 붙들고 있는 것이 오히려 자기 식의 불법에 묶인 것으로 이는 어리석은 사람의 수행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