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법이야기

[스크랩]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JU_LEE 2014. 10. 13. 08:05

 

 

실체 없는 空이어서 相 세울 수 없지만

세울 수 없어도 相으로 살려내니 色

법문: <육조단경>에서 중요한 것이 무상(無相)이다. 육조스님은 무상으로 체(體)를 삼고 무주(無住)로서 종(宗)을 삼고 묘유(妙有)로서 용(用)을 삼는다고 말했다. 무상을 다른 말로 바꾸면, 무념(無念)이고 무심(無心)이다. 탐진치 삼독(三毒), 오욕락에 의해 일어나는 상(相), 정(定)에 얽혀 일어난 상이기에 무상이라고 한다.

천태지의 선사의 공가중(空假中)이라는 일심삼관(一心三觀)의 원리를 알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천태지의 선사는 ‘이정왈공(離情曰空) 입법왈가(立法曰假) 절대왈중(絶對曰中)’ 이라고 했다. 인정(情)은 번뇌를 말하니 번뇌로부터 떠남(離)이 공이라는 것이다. 삼라만상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가(假)다. 가인데 색이다. 색인데 거짓이다. 왜냐하면, 모든 현상은 인연에 의해 연생연멸하는 것으로 영원불변의 실체성이 없다. 그래서 거짓이다. 문제는 가(假)를 그대로 인정하고 없다고 해버리면 단견에 빠진다.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상대법에 빠진다.

그렇게 되면 중도 연기법을 이해를 못하게 된다. 가는 연생연멸이므로 고정된 실체가 없어 인연이 다하면 흩어진다해서 공(空)이다. 비록 고정된 실체가 없는 가이지만 그 속에 공이 있음을 보고 공에서 또 가를 보면서 자유자재로 쓰는 것을 바로 중(中)이라고 한다. 비유하자면, 식초가 술을 거쳐서 되는 것과 같다. 술이 발효되어 식초가 되었지만 바탕은 술이다. 그러나 식초에 술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지만 바탕에 술이 있다. 가를 보지만 가에서 멈추지 않고 공을 보는 것이다. 식초에서 술을 보고 술에서 식초를 보는 것이 중(中)이다. 중이 있으므로 해서 가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공에서 멈추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되는 것이다. 색을 보되 색이 있는 것이 아니요, 색이 없는 것이 아니요, 색이 공을 드러내기 때문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자유분방하게 드러낸다. 그것이 중도이다.

  
 

공 속에는 가와 중이 들어있다. 식초에 술이 있고 술 속에 식초가 있듯 보이지 않을 뿐이지 분명 있다. 그래서 무상에서 무라는 것은 분별 망상 집착 애착 고통 괴로움 중생심이 없다는 것이다. 중생의 잘못된 변견이 없다는 말이다. 없으니까 본래 중생은 고요하다. 이것이 현상이 아닌 줄 알고 난 상태에서 본 진성(眞性)에서는 다시 경계가 일어나더라도 경계가 일어난 상은 상이지만 이미 상이 아니다.

컵을 예로 들면 컵을 연생연멸에 의해 생겨났다고 하지만 그 본성을 보지 못할 때는 집착이 된다. 연생연멸임을 알 때는 컵이라고 하더라도 곧바로 공이 따라오기 때문에 공에서는 상을 세우지 못한다. 상을 세울 수 없는데도 집착하면 악공이다. 하지만 상을 세울 수 없어도 그대로 상으로 살려낸다. 그래서 색이라고 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말로 풀어보자. 처음 산을 볼 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었다. 이는 집착 애착 중생심이 섞인 거짓의 마음 작용을 본 것이다. 그런데 연기법, 공의 입장에서 보면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니다. 공의 논리 즉 반야의 즉(卽)의 논리로 보면 번뇌가 보리고 중생이 부처이듯 산이 물이고 물이 산이다. 그런데 거기서 다시 나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선가에서 말하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가 여기에서 나온다. 앞에서 말한 공가중(空假中)의 원리에서 보기 때문에 이런 논리가 성립한다. 중이 안 따라오면 공은 공으로, 가는 가로 끝나는데 중이 같이 있기 때문에 공의 입장에서는 산이 물이 되고 물이 산이 된다.

반야에서는 공을 매개체로 즉의 논리를 편다. 그래서 ‘중생이 곧 부처다’ ‘부처가 중생이다’. <화엄경>에서는 마음을 갖고 이야기한다. 사용하는 도구만 다를 뿐 모두 같은 말이다. 마음 자리 바탕을 잘 알면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다. 중도라는 원리 때문이다. 색이고 공성이다. 그렇게 공의 입장에서 완비가 다 되는 것이다.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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