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공덕장엄
정토는 깨끗하다는 뜻이 아니라 진공을 말함
무소유가 공덕장, 청정이 정혜며 반야바라밀
공덕은 일체 번뇌 망념 체성이 없어 아무리 일어난다 해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진성은 물들거나 어두워 진 적도 없고 허물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으며 천만가지 경계를 접해 생긴다고 해도 생긴 바가 없으며 멸한다 하더라도 멸한 바가 없어 불생불멸이다. 진성이 텅 비어 있는 것이 공(空)이고 그 공에서 일체 인연을 따라 무연자리 인연 없는 사람 생명에게도 찾아가 자비를 베푸는 것을 덕이라고 한다. “공작새가 아무리 많은 색깔을 동원해서 치장한들 저 허공을 나는 기러기만 하겠는가”라고 했다. 금으로 만든 옷을 두르고 최고의 향수를 뿌리는 부귀영화를 누린다 하더라도 출가해 사문이 돼서 마음의 텅 빈 공덕만 하겠는가.
정토(淨土)는 무엇인가? 깨끗하다 더럽다 하는 양변이 아니다. 이를 초월한 것이다. 토(土)는 본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오염되지 아니한 법신 진성을 말하며, 심지(心地)라고도 한다. 정토는 청정이며 공이다. 청정과 진공, 정토는 같은 말이다.
그러면 정토를 장엄하는 공덕성은 어떻게 볼 것인가? 장엄한다고 하면 보통 꾸미는 것으로 여기지만 고정하는 실체가 없는데 어디다 꾸밀 것인가. 그러므로 장엄을 꾸미는 것으로 아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장엄에 대해서는 앞서 설명했던, 천태 지자스님의 호구십계(互具十界), 즉 일심(一心) 안에 열 가지 세계가 있다는 ‘이론’을 빌려 설명해보겠다. 일심에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천상 성문 연각 보살 불심 열 가지 세계가 다 들어 있으니 장엄도 보통 장엄이 아니다. 그런데 본래 일심에는 그런 것을 받아들인 적도, 존속하고자 하는 의도도 없다. 일심은 그냥 허공과 같아서 장엄하려야 장엄할 수도 없다. 그런 허공에다 우리가 괜히 장엄한다고 하면서 어두운 무명업식으로 지옥 아수라 축생 천상 성문 연각 보살까지 다 가져다 놓은 것이다. 일심 안에는 장엄할 십계가 존재하지 않는데 괜한 중생심이 이를 있게끔 만든 것이다. 중생이 타성에 젖어 꾸미고 지옥에도 가보고 축생에도 가보고 천상에도 가보고 하니 하루에도 만생만멸(萬生萬滅)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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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달마 육조대사의 장엄은 이를 다 해체시켜 본래 없는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런데 또 그런 것이 다 없는 것이 공덕장이라고 하니 ‘공덕장 장엄’이라는 또 다른 관념을 갖게 된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계속해 부정하는 것이다. 지우고 또 지우는 것이다. <금강경> 10분 ‘장엄정토분’에서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보살이 정토를 장엄하느냐”고 물었을 때, “아닙니다, 세존이시어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장엄 아니기에 장엄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일심 안에 호구십계를 장엄했지만, 정견으로 보니까 장엄이 아닌 것을 알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참된 장엄은 ‘본성 자리는 있다 없다 집착 분별 모두가 떨어진 무심의 자리’이며 머무는 바가 없는 ‘무주’며 중생심의 애착에 의해 이뤄지는 상을 세울 수 없기에 무상이다. 머무는 바가 없다는 것은 사사로운 정이 없음이요 사사로움이 없으니 공평무사하다. 무상이니 무소유요 무소유가 바로 공덕장이다. 그러한 자리의 본성의 체를 청정이라고 하며 청정은 텅 비어있는 것이다. 이를 육조대사는 총체적으로 정혜라고 했다. 정혜는 일체다. 분리될 수 없으며 체와 용, 이(理)와 사(事)가 걸림이 없이 자유롭다. 이를 반야바라밀이라 하니 곧 정혜이다.
곧 ‘장엄이 장엄이 아닌 줄’을 아는 것이 진장엄이다. 진장엄은 하심 겸손 나눔의 보시정신과 자신을 당당히 지켜나갈 수 있는 지조와 청정성을 상황에 맞춰 방편을 절묘하게 잘 이뤄지게 하는 것이다. 체성 자리에 묶여 있는 사람은 자유롭지 못하나 체성에 군림 당하지 않고 얽매이지 않으면 팔만사천의 방편 자리로 드러낸다. 그 드러냄이 바로 보살행이다. 언제 드러내느냐. 바로 지금이다. 언제 갈지 모르는 인생이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바로 참된 장엄을 펼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