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죽음을 생각하는 것
죽음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저절로 죽는 것 즉 자연사(自死)와 다른 것을 인연으로 해서 죽는 것(他因緣死)입니다. 어느 쪽의 죽음이건 수행자라면 모름지기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대지도론>에서는 말합니다. 이것이 죽음을 생각함(念死)입니다.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인간은 죽게 마련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부처님은 늘 수행자들에게 죽음을 생각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어느 날 스님 한 사람이 한쪽 어깨를 걷어 올린 뒤에 부처님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죽음의 모습(死相)을 닦고 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어떻게 닦고 있다는 말인가?”
“제가 앞으로 7년을 더 살게 될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7년 이상은 살고 싶지 않다는 대답은 참으로 두렵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아주 오래 살고 싶은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스님의 말을 듣고서 부처님은 뜻밖의 대답을 하십니다.
죽음이란, 숨 들이마시지 못하거나
내쉬지 못하는…멀리 있지 않은 것
“그대는 참으로 게으르게 죽음의 모습을 닦고 있구나.”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스님이 역시 한쪽 어깨를 걷고서 부처님께 공손히 합장한 뒤에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앞으로 7개월 이상 살고 싶지가 않습니다.”
산다는 것에 대한 미련이 없기에 ‘일곱 달 이상 산다’는 것에 조금도 애착을 갖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처음에 7년을 말한 스님보다 죽음에 대한 더 철저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스님입니다. 그런데 이 스님에 대한 부처님의 대답은 역시 앞서와 같았습니다.
“그대 역시 참으로 게으르게 죽음의 모습을 닦고 있구나.”
그러자 다시 뒤를 이어 스님들이 속속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7일 이상… 6일 이상… 5일 이상… 4일 이상… 3일 이상… 2일 이상 더 사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심지어 한 스님은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단 하루라도 더 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대답입니다. 그만큼 산다는 것에 대한 애착을 헌신짝처럼 버렸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역시 부처님의 대답은 ‘게으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또 다른 스님이 나서서 자신은 단 하루가 아니라 ‘아침부터 식사 시간 때까지라도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고, 또 다른 스님은 그보다 더 짧은 시간인 ‘밥 먹는 동안의 짧은 시간이라도 살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대답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자 어떤 스님 한 사람이 나서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내쉰 숨을 다시 들이마시기를 바라지 않고, 들이쉰 숨을 다시 내뱉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이 스님의 말에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참으로 이 비구야말로 제대로 죽음의 모습을 닦고 있구나. 이 비구야말로 게으르지 않은 자이다. 비구들이여, 생겨난 모든 법(유위법)은 생각생각마다 생겨났다가 사라지니 잠시라도 머물러 있지 않아서 마치 허깨비(幻)와 같거늘 지혜롭지 못한 수행자들이 여기에 속고 있다.
죽음이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쉰 숨을 들이마시지 못하거나 들이마신 숨을 내쉬지 못하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죽음에 대한 진지한 통찰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