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

[스크랩] 달마와 양무제 의 선(禪) 기복 에 대하여

JU_LEE 2015. 6. 14. 07:42

 

‘나-너’ 양변 집착 벗어난 불사

기복 넘어 ‘중도’ 가르침 전하다

부처님의 깨달은 마음인 선(禪)을 동아시아에 전한 분이 달마대사이다. 멋진 수염의 달마도로 널리 알려진 대사는 아마도 한·중·일의 동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이다. 불교를 믿지 않아도 복이 온다거나 수맥 차단 효과가 있다 해서 집이나 가게에 달마도를 걸어 둘 정도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달마대사를 통해 복을 구함은 대사의 본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르다. 과연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일까?

서기 500년경 남인도 향지왕의 왕자로 태어난 달마는 조사를 만나 대화하던 중 깨치고 법을 전하기 위해 남중국에 왔다. 당시 중국 남부는 양나라시대로 통치자는 무제(재위, 502~549)였다. 양무제는 백성과 군사를 위하여 법령을 정비하고, 호적과 토지 제도를 개혁하여 민심을 크게 얻었다.

그는 불교에도 신심을 내어 자신의 참배를 위해 동태사라는 화려한 사찰을 지었을 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에 2500개나 되는 절을 세우고 탑을 쌓는 불사를 하였다. 또한 역경과 승보 공양, 그리고 대법회를 자주 열었는데, 화려하기가 이루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신심의 양무제를 ‘불심천자’라 부른다. 하지만, 이 모든 불사를 국가 세금과 백성의 노역으로 했으니 원성이 자자했다.

양무제는 인도에서 달마라는 고승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궁궐로 초청한다. 당시 무제가 궁궐 밖까지 대사를 영접하러 나왔다고 하니 그의 신심과 환대 분위기를 짐작할 수가 있다. 달마대사를 모신 무제는 극진히 대접하고는 묻는다. 이 문답은 <조당집>에 기록되어 전해 온다.

  
 

“짐이 절을 짓고 불상을 조성했는데 어떤 공덕이 있을까요?” “공덕이 없습니다.”

“어째서 공덕이 없습니까?” “이는 인천의 작은 과보요 유루(有漏)의 원인이어서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착한 인이 있다고는 하나 실상이 아닙니다.”

양무제가 벌인 불사의 목적은 자신이 복을 받기 위해서였다. 소위 기복(祈福) 신앙이다. 기복은 불교와 모든 종교의 출발이자 존재 이유다. 나와 가족, 그리고 공동체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착한 일을 하고 남을 돕고 절대자를 믿는다는 것은 어느 종교나 같다.

그런데, 불교는 남을 돕고 착한 일을 하라는 기복신앙에서 더 나아가 중도(中道)의 종교이다. ‘내가 있다’는 입장에서 상대를 돕고 착한 일하는 것은 ‘나-너’ 양변에 집착을 벗어날 수 없다. ‘내가 있다’는 전제로 하는 모든 선행과 불사, 그리고 수행까지도 생사 윤회를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달마대사는 양무제에게 ‘공덕이 없다’ 한 것이다.

하지만, 양무제는 ‘내가 있다’는 양변에 집착해서 자기 복을 짓기 위해 백성들의 고혈을 짜낸 혈세로 불사를 했으니 ‘공덕이 없다’는 달마대사의 법문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말년에 양무제는 그토록 원했던 복은커녕 황제에서 쫓겨나 굶어죽었으니 그의 기복 불사는 엄혹한 과보를 받았다.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인가? ‘나-너’라는 양변을 여읜 중도 정견에서 선행과 불사, 그리고 수행을 해야 한다. 만약 양무제가 중도 정견을 갖추고 불교를 믿고 국가 경영을 했다면,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무리한 절 짓기보다는 백성들이 잘 살고 행복하게 하는 불사를 했을 것이다.

또 건축 불사를 하더라도 황제의 사비와 백성들의 자발적인 마음에서 우러러 나오는 시주로 했다면 그 공덕이 무한하였을 것이고 그렇게 비참한 과보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양무제의 불사는 지금 우리에게도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다.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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