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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이야기

[스크랩] 번뇌를 잃지 마라

늘 깨어 있음은 空이치 잊지 않음

깨어 있되 후회하지 않음도 중요

세상을 떠나신 지 25년이나 지났지만 동국대 후문을 지나칠 때면 늘 은사이신 고익진 교수님이 생각납니다. 후문 아래 자리한 조촐한 자택의 서재에서 그 분은 딱 한 번 이렇게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번뇌를 잃어버리지 마라.”

20대 시절, 그 말씀이 뜬금없게 느껴졌습니다. 번뇌를 끊으려고 찾아온 제자들에게 그걸 잃어버리지 말라니요. 하지만 그 어떤 가르침보다 이 말씀이 가슴에 깔깔하게 남았습니다. 대충 어물쩍 지내려고 할 때면 늘 저 음성이 나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리고 오늘 대지도론에서 그 말씀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어떤 나라에 대신 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모양인데 남에게 들킬까 염려하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왕은 눈치를 챘습니다. 그래서 대신을 처벌할 빌미를 잡으려고 이런 명을 내렸습니다.

“내게 맛좋은 양고기를 가져와라. 하지만 먹음직스럽게 살은 올랐으되 기름기가 없어야 한다. 이 명을 따르지 못하면 처벌하겠다.”

대신은 그 날 이후 양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신선한 풀이 자라있는 곳에 날마다 양을 데리고 가서 먹였습니다. 양은 날마다 신선한 풀을 먹고 맑은 물을 마시며 토실토실하게 살이 올랐습니다.

그런데 대신은 하루에 세 차례씩 이리를 양에게 몰고 갔습니다. 맘껏 신선한 풀을 먹으면서도 양의 뇌리에는 늘 이리에게 잡혀 먹지는 않을까 긴장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대신은 왕에게 양을 몰고 갔습니다. 과연 왕의 명령대로 토실토실 살찐 양고기에는 기름기가 없었습니다. 대지도론에는 뒷이야기가 실려 있지 않지만 분명 왕은 대신의 지혜에 감탄을 했을 테고, 어쩌면 대신은 틀림없이 잘못을 용서받았을 것입니다.

<대지도론>은 이 이야기를 이렇게 끝맺습니다.

“보살도 그와 같으니, 덧없고 힘이 들고 자기성품이 비었다는 이리를 보면서 온갖 번뇌의 기름기를 없애고 모든 공덕의 살을 찌운다.”

보살은 중생 속에 머물러 그들과 동고동락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마음속에는 부처님의 경지를 향한 열망이 조금도 식지 않습니다. 정반대일 수도 있는 두 차원을 한 몸으로 지내느라 보살은 지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보살은 그걸 참아냅니다. 대지도론 제15권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살은 모든 번뇌에 대해 인욕을 닦되(修忍) 번뇌를 끊지(斷結)는 않는다. 번뇌를 끊으면 잃는 바가 매우 많으니, 아라한의 길에 떨어져 근이 무너진 자(根敗)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막기(遮)만 하고 끊지는 말아야 하니, 인욕을 닦되 번뇌를 따라다니지 않는다.”

근이 무너진다는 말은, 수행자가 아라한에서 멈추고 부처가 되려고 마음내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즉 부처가 될 싹을 잘라버린다는 말입니다. 부처가 되려고 마음먹은 사람이 보살입니다. 아직 부처가 되지는 못했지만 완전한 지혜를 구하려고 함과 동시에 뭇 생명체를 가엾게 여기는 마음도 나란히 지니고 있기에 보살은 중생을 위해 번뇌도 기꺼이 참아냅니다. 생사를 두려워하고 싫어해서 빨리 열반에 들려고 하는 수행자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번뇌를 견디려면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무상하고 괴롭고 공한 이치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깨어 있되 후회하거나 진리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습니다. “내가 이 정도 수행했으니 이젠 됐겠지”라며 안도하고 머물지 않습니다. 보살의 인욕은 이러해야 한다고 대지도론에서는 말합니다.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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