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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법이야기

[스크랩] 부처와 보실의 차이점

부처님은 중생의 아버지

반야는 모든 생명의 할머니

붓다는 세상의 모든 이치를 환히 꿰뚫어 완전하게 아는 존재입니다. 이런 부처님의 지혜야말로 완성되었기 때문에 일체종지(一切種智)라고 부릅니다. 모든 것에 대해 완벽한 지혜란 뜻입니다.

보살의 지혜와 부처님의 지혜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습니다. 완전한 것(부처님의 경지)과 아직 완전함에 이르지 못한 것(보살의 단계)의 차이니까 당연합니다. 그런데 <대지도론>제18권에서는 보살에게도 완전함을 뜻하는 ‘바라밀’이란 말을 쓸 수 있다고 말합니다. 비록 완전한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부처님이 이루신 그 완전함(바라밀)을 목표로 살아가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두 가지 비유를 들면서 아직 완전하지 못한 보살도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첫 번째 비유는 바다입니다.

어떤 사람은 깊은 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잠수해서 바다의 밑바닥에 닿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제 막 백사장을 벗어나 바닷물에 몸을 담갔습니다. 바다 밑바닥에 가 닿은 사람과 이제 막 물결이 찰랑이는 바닷물에 몸을 담근 사람은 그 수준 차가 너무 큽니다.

하지만 우리는 두 경우를 모두 가리켜 ‘바다에 들었다’라고 부릅니다. 장차 그가 두려움을 넘어서서 계속 나아가면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깊고 얕은 차이는 있지만 ‘들어갔다’고 하는 점에서는 같듯이, 부처님과 보살도 그와 같아서 부처님은 그 밑바닥까지 가 닿으셨지만, 보살은 모든 번뇌와 습을 끊지 못해 힘이 약하기 때문에 깊이 들어가지 못한다.”

<대지도론>제18권에서는 이렇게 말하면서,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보살로서 하루하루 살아가면 그 역시 바라밀을 실천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다고 합니다.

두 번째 비유는 등불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두운 방에 등불을 밝혀 방안의 사물들을 비추면 어둠 속에 있던 물건들이 분명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조금 더 불을 밝히면 방안이 더욱 환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서 밝힌 등불은 어둠과 함께 머물러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밝힌 등불이 앞서 등불로도 깨지 못한 어둠을 깨뜨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앞서의 등불이 전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건 아닙니다. 그것만으로도 어둠 속에 있던 사물을 볼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일 앞서 등불의 어둠이 없었다면 나중에 아무리 등불을 밝혔더라도 더 밝아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보살과 부처님의 지혜도 바로 이런 등불과 같다고 <대지도론>에서는 말합니다.

“보살의 지혜가 비록 번뇌나 습과 함께 있었더라도 실상(참모습)을 얻을 수는 있으니, 마치 앞서 밝힌 등불로도 사물을 비출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지혜는 온갖 번뇌와 습을 완전하게 없앴으며, 모든 법의 실상도 얻으셨으니, 마치 나중에 밝힌 등불이 앞서의 등불보다 몇 배나 환한 것과 같은 이치다.”

<대지도론>에서는 곧이어 반야바라밀을 칭송하는 게송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 참 좋은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과 보살들은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하네. 반야는 불보살의 어머니이니 낳고 길러주기 때문이네. 부처님은 중생의 아버지요, 반야는 그런 부처님을 낳으니, 반야는 곧 모든 생명의 할머니라네.”

부처님을 중생의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라고 비유한 것도 흥미롭지만, 반야 역시 중생의 ‘할아버지’가 아닌 ‘할머니’로 비유한 것도 생각해볼 만한 점입니다. 아무튼 우리 아버지는 붓다요, 우리 할머니는 ‘반야’라는 사실, 이것 하나 챙겼습니다.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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