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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법이야기

[스크랩] 경지에 도달할 때까지 끝업없는 수행정진

 

경지에 도달할 때까지 끝없는 수행 정진

비록 돈오이나 자비 하심 성찰 거듭해야

법문: 네 번째는 심해탈관문(心解脫關門)이다. 주심 공심 무상 수행의 점차법이 다 녹아 심해탈문에 같이 들어온다.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서로 상즉상입(相卽相入)하는 것이다. 육바라밀을 일상생활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 이 관문이다. 정견이 서있기 때문에 세속적인 원망, 상대적인 너와 나의 구분 같은 세계는 본래 청정무구한 자성이 살아가는 방법이 아님을 안다. 정견이 실제로 내 마음에 적용되도록 비춰보고 누가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슬픔을 주고 괴로움을 주고 고통에 빠트리더라도 원망을 하지 않고 ‘내가 본심을 깨닫도록 경계를 주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심해탈관문이다. 마지막 경지에 가면 저절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지만 이 단계까지는 인위적으로 애를 써야한다. 경계를 돌아보면서 이 경계를 통해서 내가 해탈을 이루겠다 다짐하는 것이다. 낙엽이 나무에서 떨어져 낙담하고 있으면 소 돼지가 다 밟아 짓뭉개지만 지혜의 바람을 타면 나무 가지에 붙은 게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창공을 날게 된다. 이처럼 자기 마음 점검하는 것이 심해탈 관문이다.

다섯 번째는 선정관문이다. 선정에 대해 육조는 모든 경계가 실체가 없고 연생연멸임을 알고 절대 동하지 않는 것이 좌(座)이며 항상 자성청정한 마음을 관하는 것이 선(禪)이라고 했다. 참선은 반드시 좌선으로부터 시작한다. 초심에서 좌선을 익혀 마음을 고요히 하게 된 이후에는 동중선(動中禪)으로 간다. 좌선에서 다시 동중선으로 가야하며 동중선이 잘되려면 좌선이 잘 돼야 한다. 좌선에서 화두 의단을 얻어야 동중선에서 진의가 흐트러지지 않고 잘 되어간다. 좌선이 동중선에서 잘 펼쳐지는 것을 행주좌와어묵동정이라고 한다. 화두가 일상생활에서도 여여하게 될 수 있게끔 이타행하고 자신을 겸손하게 하고 화두를 굳건하게 다져야 화두하는 참모습이다.

  
 

여섯 번째는 진여문이다. 진여문 경계에 들어가면 행주좌와어묵동정에서 ‘정’의 힘을 얻었기 때문에 여기서부터는 인위적인 수행법이 안 들어간다. 여기서부터는 보아도 본 바 없고, 닦아도 닦은 바 없고 들어도 들은 바 없는 경지가 된다. 자연스럽게 됐기 때문에 닦는다는 생각 없이 조작한 바 없이 일상생활에서 무심하게 흘러가는 것이다. 어떤 역경계 마구니 외도를 만난다 해도 이미 그 모든 것들은 지나온 수행법으로 인해 저것이 모두 실체가 없고 거품이 없고 가치가 없음을 아는 것이다.

마지막 지혜관문이다. 앞서 말한 주심 공심 무상심 심해탈 심정진이 모두 어우러진 것이 지혜관문이다. 주심에서 애썼던 것이 지금 와서 볼 때는 참 둔한 수행이었구나, 업장이 두텁다 보니 참 힘들게 공부 했구나 여겨진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앞선 기도 염불 하염없는 참회의 눈물 원력 이런 것들이 모두 발판이 된 것이다. 하나의 과일이 만들어지기까지 바람과 토양과 비와 심지어 고양이 울음, 엿장수 소리까지 모든 생명이 찬탄하고 축복해주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 과일은 세상의 모든 맛이 어우러져 진한 향을 갖게 된다. 점수 수행도 결국은 돈오돈수 돈오견성으로 가게 된다. 그래서 점수수행이 중요한 것이다.

아기가 걸을 수 있지만 바로 걷지 못한다. 엄마가 따뜻한 얼굴을 마주하며 손뼉을 치며 ‘아가야 이리 온’ 하면 반가움에 천천히 어렵게 발걸음을 옮겨가듯 그런 어머니의 마음처럼 자비를 갖고 대해야 한다. 기도 염불 참선이 모두 자비에서 나오는 것이다. 지혜문에 들어오면 불법(佛法)이 불법(佛法)이 아니다. 이미 이 사람에게는 모든 정해진 법이 없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강경>에 이르기를 “여래가 여래가 아니기 때문에 여래라 하며, 불법이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불법이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니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했다. 부처가 부처로서 그냥 부처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굳이 불교를 믿으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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