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제3분 ‘대승정종분’은 부처님이 최고 어른으로 나오는 ‘상좌부 불교’와 다르다. 석가모니부처님만 가르침을 말하는 ‘상좌부’(소승불교)와 달리, 대승에서는 석가모니부처님이 사라지고 부처님 말씀으로 ‘수많은 부처님 가운데 어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으로 나타난다. 세존, 여래, 그냥 부처님이 주인공이고, 철저하게 석가모니부처님은 왕따시키고 그 자리를 부처님을 모신다. 그런 불교가 대승불교이다.
‘부처님 불교’의 대표적 경전인 <금강경>에서 대승의 가장 근본 가르침을 3분에 담았다. 불교의 대들보 같은 원리로서, 모든 것이 다 포함된 대승의 핵심 꽃이다. 그렇게 많은 부처님 말씀 가운데 <금강경>은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면서 그 마음을 “세상에 있는 일체중생의 종류인 알에서 태어난 것, 태에서 태어난 것, 습기에서 태어난 것, 변화하여 태어난 것, 형상이 있는 것·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들을 내가 모두 완전한 열반에 들게 하여 멸도하리라”고 했다.
다만 바로 뒤이어 “이와 같이 한량없고 셀 수 없고 가없는 중생을 멸도하나 실로는 ‘멸도를 얻은 중생이 없다’하라”고 말씀하고, 이어 “왜냐 하면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으면 이는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경문이 나와있다.
모든 중생을 내가 완전히 멸도에 이르게 하면서, 하필 ‘멸도한 중생은 없다’는 표현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이 가르침은 ‘한량없는 중생을 다 멸도하면서 나는 멸도한 중생이 하나도 없다는 마음 자세가 돼야 한다’는 방편이다.
중생들을 제도해서 완전한 열반에 들게하는 멸도(滅道)는 대승·소승을 막론하고 모든 불교의 대 전제이고 근본적인 문제이다. 그런데 대승불교 가르침은 ‘한량없이 많은 중생을 제도하여 열반에 들게 하지만, 실제로는 제도를 받아 열반에 든 중생은 하나도 없다는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불교의 근본적인 문제가 나온다. 왜 중생멸도하고 나서 멸도를 얻은 중생이 없다는 것일까. <금강경> 제5분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에는 ‘무릇 있는 바 상은 다 이것이 허망하니, 만약 모든 상이 상아님을 보면 바로 여래를 보리라’는 구절이 있다. 눈에 보이는 모든 형상이나 소리는 허망하여 실체가 아니다. 그래서 우선은 모든 상이 모양이나 소리가 아닌 것을 보아야 한다. 바로 그대에 부처가 보이고, 모습을 여윈 부처님을 친견하게 되며, 그 부처가 반야바라밀이다.
서울을 정확히 모르면 남대문 앞에서 서울을 찾는다. 남대문 앞에서 서울을 다시 찾을 수 없는 이치를 대승불교에서 그 사실 관계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본성은 이미 멸도돼 있는 마하반야바라밀이다. 중생이나 삼라만상이 깨달음 자체이고, 살고있는 부처님이란 가르침이다. ‘내가 부처님이야’ 이렇게 말하면서도 막상 자신은 근심걱정이 많아서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부처님이 보기에는 모든 사람이 부처님인데 자신은 아니라고 하는 것을 그렇게 일컬었다. 모두 멸도돼 있는 중생이고, 실제로도 멸도한 중생인 내 자신이 부처이고 반야바라밀이며, 진리의 생명인데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대승에서는 석가모니부처님은 아미타 부처님을 제도할 수 없고 약사여래불을 제도할 수 없다. 중생은 구별이 있으나 부처님에서는 모든 중생이 모두 부처님이다. 부처님을 제도할 수 없고 멸도시킬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중생, 구루중생이 이미 부처이다. 모든 중생이 부처라는 것을 믿고 받아들이면 불교이고 대승불교이며, 이것이 아니라며 ‘나는 아직도 허물이 있고 죄가 있다’라고 생각하면 불교가 아니다.
부처님이 말씀한 ‘모든 사람이 해탈돼 있는 존재’란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 ‘대승정중분’에서 모든 존재는 부처님이며, 우리 본성은 이미 멸도돼 있는 마하반야바라밀이며 완전한 지혜와 덕성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모르고 중생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모든 존재는 완벽하다. 여기서 ‘사람만은 완벽하지 않다’는 이론은 성립되지 않는다.동식물이 완벽한 존재인 것처럼 인간도 완벽한 존재임에도, 단지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는 그런 교육을 받았다. 극락이나 천당 지옥을 본 사람을 없지만, 세뇌를 받았을 뿐이라서, 빨리 이 개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간은 모두 완벽한 품성 능력 갖고 태어났음에 눈을 떠야 한다. 그런데 왜 그런 생각을 못하느냐? 욕심 때문에 그 본성이 떠오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로 살면 완전한 자유가 있게 된다. 사람은 욕심으로 살기에 고(苦)로 살아가는 것이다.
중생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 동물이 그 상태 속에서 동식물이 사는 것처럼 아무 불편없이 그냥 사는 것이 해탈이고 부처님이다. 이것이 ‘대승종종분’의 결론이다.
‘여리실견분’의 가르침은 진리가 아닌 진실이고 사실의 관계를 밝힌다. ‘가르침대로 참답게 살라’는 의미의 5분은 핵심이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의 바른 해석이다. ‘무릇 있는 바 상은 다 이것이 허망하니, 만약 모든 상이 상 아님을 보면 바로 여래를 보리라’ 이렇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일렀고, 이를 수보리는 ‘세존이시여 어떤 중생이 이와 같은 말씀의 글귀를 듣고서 자못 실다운 믿음을 낼 자가 있겠습니까?’하고 되물었다. 이에 부처님의 응답이 <금강경> 진리의 핵심이다.
부처님은 ‘수복(修福)’을 말씀하며, ‘능히 이 글귀에 신심을 내며 이로써 실다움을 삼으리라’(지계수복자·持戒修福者…능생신심·能生信心 이차위실·以此爲實)
여기서 ‘계’는 우리들의 본성이 본래 청정하다는 ‘자성청정계(自性淸淨戒)’를 뜻한다. 진리는 실다운 모습의 본체가 무엇인가,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보는 것으로 실다운 모습을 봤을 때 비로서 부처를 보는 것이다. 그 부처님은 모습이 없고 형상이 없고 진리일 뿐이다. 이를 인정해야 하고, 이를 보기 위해 노력하는 것 수행이다.
그래서 ‘눈을 뜬다’고 하는 행위는 천천히란 행태가 성립되지 않기에 돈오돈수이다. 백척간두 진일보로서 마음을 볼 수 있는 눈을 ‘확’ 뜨는 것이며, 이렇게 수행하는 방법이 진심을 내는 것이며, ‘수복자’는 ‘계로 복을 담은자’를 의미한다.
‘지계수복’은 해탈·멸도를 믿으며 계로 복을 담는 것이다. 흔히 단순 기복(祈福)의 부정적 이미지 반대로 적용하는 작복(作福)으로 ‘복을 짓는다’고 말한 것은 <금강경>의 ‘수복’ 곧, ‘계로 복을 담는다’와 전혀 다르다.
여기서 ‘계’란 상이 없는 계로서, ‘내 자상이 바로 부처님이라는 믿는 것’이다. 믿는 것에서 나아가 ‘믿고 써야’ 지계의 의미가 정상화된다. 곧 내 한없는 능력의 생명을 믿고 내어 쓰기 위해 적극 써야 한다.
‘내어 쓰기’란 불교에서 염불하는 것이다. 염불할 때, 불자로서 예불은 복을 비는 것이 아니다. 내가 절을 하는 그 순간으로 내어 쓰는 것이 수복이며 복을 닦는 것이다.
생명을 내어 쓰기 위해 예불로서 수복하면 행복이 온다. 철저하게 믿어야 내 생명을 창조할 수 있으며, 내가 창조주가 되는 신령스런 힘을 내어 쓰기 위해 부지런히 수복의 <금강경> 근본 가르침을 알게 된다. 믿고 내어쓰는 수복으로 계사년 여러분의 행복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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