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입힌 자에게 감정 품지 않고
새로운 인생을 향한 의지 ‘확고’
사람들이 많이 힘들어합니다. 마음에 큰 상처를 받은 게 틀림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힐링’이라는 말을 심심찮게 듣기 때문입니다. 대중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연예인들도 힐링이 필요한가 봅니다. 텔레비전의 프로그램에서도 힐링은 대세입니다. 심지어 주말드라마 <청담동 앨리스>에서 주인공 남자배우가 그동안 자기를 괴롭혔던 기업가 아버지에게 통쾌하게 복수한 뒤 기분 좋게 웃어대며 “아, 이제 힐링됐다”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위로나 위안을 받거나 해서 뭔가 속에 맺힌 게 확 풀리는 걸 힐링이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지만 힐링은 단순히 위로나 위안이 아니라 치유입니다. “원래 의학에서 힐링(healing)이라는 말은 손상된 조작이 본래의 기능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서광 스님의 <치유하는 불교읽기>에서)라는 설명도 있듯이 잠깐의 위안이나 속 뚫림이 아니라 완전히 상처에서 극복되는 것이지요. 혀끝에서 나오는 몇 마디 말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성찰과 모색을 통해 온전히 새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힐링이라는 것입니다.
대지도론에는 이런 힐링의 예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 석가모니 부처님이 살아계실 때의 일입니다. 당시 슈라바스티(사위국)를 다스리던 프라세나짓왕에게는 조카뻘의 젊은이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런데 형의 아들이기는 했지만 출생의 비밀이라도 있는지 한문경전에서는 노(奴) 즉 종의 신분이었다고 합니다. 건저(?抵)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부처님이 계시는 제타바나에서 일을 도와주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신분은 낮았지만 외모가 무척 준수했습니다. 건강미가 넘쳤고 성격은 무척 온화하고 선량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왕의 대부인(大夫人)이 그만 청년에게 반해버렸습니다. 대부인은 저돌적으로 청년에게 애정공세를 펼쳤습니다. 하지만 청년은 응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청년이 외면하고 피하자 대부인은 결국 분노하고 맙니다. 그녀는 왕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저 방자한 천한 것이 나를 욕보이려 했다”라고 청년을 모함했습니다.
왕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청년을 능지처참하라고 명을 내립니다. 누명을 쓰게 된 청년은 졸지에 끔찍한 변을 당하고 맙니다. 그리고 딱 숨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에 무덤가에 버려집니다. 아버지가 왕족이었음에도 종의 신분으로 살아가야 했던 건저입니다. 하지만 여인의 애정공세에 이런 참변까지 당하게 되었으니 그 참담한 심정이 어땠을지 짐작조차도 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온갖 맹수들이 피 냄새를 맡고 몰려 왔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맹수들보다 한 발 앞서 도착한 부처님이 광명을 놓아 그를 비추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너덜너덜해진 그의 육신이 이내 예전의 몸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다 죽어가던 그가 회생의 큰 숨을 돌리며 커다란 기쁨에 휩싸이자 부처님은 그에게 법문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단숨에 아라한이 되기 직전인 성자의 세 번째 단계(아나함)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부처님의 손에 이끌려 제타바나로 되돌아온 그는 맹세합니다.
“이미 부서진 제 몸을 다시 이어주고 치유해주셨습니다. 저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부처님과 승가에게 이 몸을 바치겠습니다.”
뒤늦게 자신의 경솔한 처결을 깨달은 프라세나짓왕이 한걸음에 달려와 나라의 절반을 주겠다고까지 말하며 돌아가자고 했을 때 건저는 거절합니다. “싫습니다. 하지만 왕께서도 더 이상 미안해하지 마십시오. 왕의 잘못도 아닙니다. 제가 전생에 지은 죄의 과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몸을 부처님과 승가에 이미 바쳤습니다. 다시 세속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제8권)
건저는 치유되었습니다. 육신이 나았을 뿐만 아니라 해를 입힌 자에게 더 이상의 감정을 품지 않은 채 새로운 인생을 향한 의지가 확고해졌습니다. 그야말로 ‘힐링’된 것이지요. 부처님의 은혜를 입으면 불완전한 상태가 완전(具足)해진다는 대지도론의 이 일화를 보면, 치유의 대가 석가모니 부처님을 만난 건저야말로 힐링의 가장 모범적인 예임에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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