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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법이야기

[스크랩] 이 세상에서 깨달음 을 주는 학문은 없더

 

본문: 보살이 법계를 분명히 보기 때문에 법안이 청정하다고 말한다. 법은 생멸함이 있다는 견해에 안주하지 않기 때문에 역시 법안이 청정하다고 말하느니라. 경(經)에 이르시길 어리석음과 애착은 불멸이니 어리석음과 애착은 본래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멸할 수는 없다고 하셨느니라. 어리석음과 애착은 안과 밖 중간에서 찾아도 볼 수 없고 얻을 수 없느니라. 또한 시방에서 그것을 구하여도 터럭만큼의 모습도 얻을 수 없느니라. 모름지기 멸하여 해탈을 얻을 수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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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法만 생사윤회 벗어날 길 알려줘

해설: 보살은 법계가 ‘참나’에 비친 업식의 환영임을 안다. 환영임을 알아 욕망이 없으니 법안이 청정하고 분별하고 집착하지 않으니 열반이요 해탈이다. 나 또한 환영이니 무아요 참나를 통해 비추니 법계가 내 모습이요 내가 법계임을 안다.

일체처일체시에 참나의 성품으로 비추니 팔정도요 육바라밀이요 사무량심이요 지계요 보살행이다. 나와 욕망과 집착, 구하는 대상 이 모두가 본래 내가 만든 환영임을 알아 구하지도 버리지도 않는다. 구하는 그 마음이 바로 법계의 근원이요 생사윤회의 근본임을 안다.

◼ 24. 무아와 무집착이 허공과 같음

본문: 묻기를, 세상 사람들이 갖가지 학문을 하는데 왜 도(道)를 얻지 못합니까? 답하기를, 자기를 보는 고로 도를 얻을 수 없느니라. 만약 능히 자기를 보지 않으면 바로 도를 얻을 수 있느니라. 자기는 곧 아상이니라. 이처럼 지극한 도인이 괴로움을 만나도 걱정하지 않는다하고 즐거움을 만나도 기쁘지 않는 것은 자기를 보지 않는 연고니라.

또한 고통과 즐거움이 없는 자는 자기를 잊은 고로 지극히 텅 비어 없음을 얻느니라. 자기를 항상 스스로 잊어버리는데 다시 어떤 물건이 잊어 버리지 않겠는가? 천하에 자기를 버렸다고 하는 자는 자기가 있느니라. 자기를 버릴 수 있을 때 일체법이 본래 실체가 없음이니라.

해설: 세상의 모든 학문과 철학 종교 온갖 이치를 통해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불법(佛法)을 제외한 모든 학문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나와 대상 모두가 실체한다는 바탕 위에 더 나은 행복을 얻기 위한 방법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즉 참나에 비친 나와 대상 모두 실체한다고 여기니 겁을 다하도록 배우고 실천해도 중생의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 참나를 깨달으면 나라는 것, 나의 즐거움, 고통, 내가 보고 느끼는 대상 이 모두가 본래 실체가 없음을 아니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버린단 말인가. 오직 이 모두를 비추어 아는 참나만이 홀로 비출 뿐이다.

본문: 이리저리 생각하고 꾀를 내어 생노병사, 우비고뇌, 추위와 더위, 비, 바람 등 일체 원하지 않는 일을 하게 되나니 이것은 다 망상이 나타난 것이니라. 환화와 같은 연유요 가고 머무는 것이 자기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니라. 왜냐하면 인연 따라 일어난 고로 환화이니라.

이리저리 생각하여 거역하면 가고 머묾이 듣지 않느니라. 고로 번뇌가 있게 되느니라. 자기를 집착한 연유로 바로 가고 머묾이 있게 되느니라. 단 가고 머묾은 자기로부터 연유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느니라. 자기라는 것도 바로 나의 행하는 바이니 이것은 환화의 법이므로 머물러 둘 수 없느니라.

해설: 우리는 매 순간 지금보다 더 나은 행복을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그 행위가 현재 괴로움을 주고 그 행위의 흔적이 미래에 괴로움을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두가 참나에 비친 내 마음(업식)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구함도 벗어나고자함도 집착이니 생노병사와 우비고뇌가 끝없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본래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은 참나에 비친 업식의 환영이지 참나와는 관계가 없다. 나도 대상도, 대상으로 인해 느끼는 분별심도 모두가 환영이다. 실체로 여겨 구하거나 버리려는 그 마음이 환영의 원인이다. 나와 대상, 느낌과 분별 모두가 환영임을 알면 일체처일체시에 걸림이 없다.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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