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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법이야기

[스크랩] 중도법 (中道)법 양변을 다 버린 중도법 으로 살아가자

 

 

부처님께서는 첫 설법 뒤에도 당신의 깨달음을 팔정도, 사성제, 삼법인, 연기, 무아, 공, 불성 등등 다양하게 말씀하여 팔만대장경이 성립되었지만, 이것이 모두 중도를 다르게 표현한 말이다.

초기 경전인 <숫타니파타>에서는 중도를 ‘양변에 집착을 떠나고 가운데도 집착하지 않는다’고 표현한다. 여기서 양변(兩邊)이란 ‘고-락’, ‘선-악’, ‘나-너’ 등 대립하는 두 변견(邊見)을 말한다. 이것은 현실세계에서 ‘좌-우’, ‘빈-부’, ‘갑-을’, ‘남-북’ 등 대립하는 어떤 것도 해당한다.

서양 철학의 ‘신-인간’, ‘물질-정신’ 등의 이원론, 이분법적인 세계관도 양변이다. 이 양변에 생각이 머물러 집착하고 있으면 지혜가 나올 수 없다. 집착을 놓아야 지혜가 나온다. 아울러 양변에 집착하지 말라 하니 그 가운데를 중도로 착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가운데도 아니다. 그럼 어디를 말하는가?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평상심이고, 바로 선(禪)…

우리는 ‘내가 있다’는 착각에 빠져 늘 나와 남을 비교하고 우월하고 열등하다는 분별심으로 살아가니 단 하루도 편 한 날이 없다. 나보다 잘나고 많이 가지고 배운 사람을 만나면 위축되고 나보다 덜 배우고 가진 것이 부족한 사람을 마주하면 우월의식이 나온다. 이렇게 행복과 불행이 오락가락하는 것이 양변에 집착하는 중생의 마음이다.

부처님은 이 양변에 집착을 떠나고 가운데도 집착하지 않는 중도를 깨치라 한다. 예컨대 내 마음이 대립하는 양변의 어느 편이 옳다고 생각해서 집착하면 반대편은 그르다고 보게 된다. 이렇게 해서는 공존, 평화가 오지 않는다. 내 견해와 다른 사람과 늘 시비 갈등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내 마음 안에도 양변에 집착하는 마음이 오락가락해서 늘 초조하고 불안해서 행복할 수가 없다.

오히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그 견해를 집착하지 않고 내려놓으면, 상대를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나와 상대의 마음을 다 이해하는 지혜가 나와서 평화와 행복의 길을 갈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중도가 영원한 자유와 행복의 길이라 하신다.

  
 

초기불교에 ‘사마타 - 위빠사나’가 있다. ‘지관(止觀)’이 바로 사마타-위빠사나다. 지(止)는 사마타, 관(觀)은 위빠사나에 해당한다. 지관은 우리 마음의 선정 삼매를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부처님 마음이고, 중도이다. 지관(止觀)을 풀어보면 ‘번뇌가 그치면(止) 지혜가 나온다(觀)’는 뜻이다.

즉, 우리 마음에 양변에 집착한 번뇌를 비우면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가 나오는 것이다. 먹구름이 걷히면 해가 나오듯이 ….

초기불교에서 강조하는 사성제(四聖諦)인 고집멸도(苦集滅道)도 중도를 말한다. 가령, 우리 삶이 괴로움과 괴로움의 쌓임인 고집(苦集)을 알면[觀], 그것을 없애는 멸도(滅道)가 되어[止] 자유자재한다. 그러니 사성제가 그대로 위빠사나(觀)-사마타(止)이고, 부처님이 깨달은 중도를 말하는 것이다.

<반야심경>의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즉, ‘물질이 공(空)이고 공(空)이 물질이다’도 중도를 말한다. 물질과 공이 둘이 아니라 중도로 존재한다. 물질과 공을 대립적으로 보면 갈등이 일어나지만, 양변에 집착을 비우고 다 아우르면 조화롭게 활용하는 지혜가 나온다. 그 지혜의 길이 바로 중도이고, 큰(마하) 지혜의 바라밀인 ‘마하반야바라밀’이다.

우리 조계종의 소의경전인 <금강경>의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이 난다’는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도 중도를 말한다. 우리 마음이 어디에 집착하여 머물지 않으면 그대로 지혜가 나온다.

그 마음이 내편-네편, 진보-보수, 선-악, 부처-중생 등의 양변에 머물지 않으면 중도가 되어 자유자재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그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평상심이고, 바로 선(禪)이다.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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