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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법이야기

[스크랩] 해탈은 꿈을 깨는 것

 

본문: 생사와 열반은 같으므로 버리지 않느니라. 생(生)에 즉하여 생이 없고 사(死)에 즉하여 사가 없느니라. 생을 버리기를 기다리지 않고 무생(無生)에 들어감이요 사를 버리기를 기다리지 않고 무사(無死)에 들어가느니라.

적멸인고로 이것이 열반이니라. 경(經)에 말씀하시되, “일체 중생이 본래 적멸이니 다시 멸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은 아니니라.” 모름지기 생사를 버리지 않아야 비로소 이것이 열반이니라. 마치 어떤 사람이 얼음을 버리지 않고 이것은 물이라고 아는 것이니 성품이 스스로 동일하기 때문이니라. 생사 열반도 역시 성품이 동일한 까닭에 버리지 않는 것이니라.

해설: ‘참나’에서 비추어보면 생사도 허상이요 열반 또한 허상이다. 나라는 상과 내 몸, 내 몸의 감각기관을 통하여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모든 대상들, 이 모두는 참나에 비친 업식의 환영일 뿐이다. 중생들이 어리석어 나와 내몸, 감각으로 느껴지는 모든 대상들이 실체한다 여겨서 집착하여 구하려하니 생사윤회요 허상임을 알아 집착하여 구하지 않으니 열반인 것이다.

모두가 허상일 뿐인데 생사와 열반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생사도 환영이요 무생무사 또한 환영이니 무엇을 집착하고 무엇을 버리고 구한단 말인가. 꿈속에서 괴로워하니 꿈을 깨는 방법과 꿈을 깨는 것이 있는 것이지 꿈을 깨고 나면 꿈속의 온갖 일과 꿈깨는 방법, 깨어남조차 모두가 허상일 뿐이다.

본문: 그러므로 보살은 생사에 처해서도 생사를 버리지 않느니라. 보살이 부동에 머무는 것은 머무름이 없음에 머무는 것을 머무름이라고 하느니라. 외도는 여러 견해를 즐겨하는 고로 보살이 견즉무견임을 가르치고자 하느니라. 견해를 버리려고 노력하지 않은 후에야 무견이니라.

천마는 생사를 즐겨하나니 보살이 생사를 버리지 않음으로써 생에 즉하여 무생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생을 지니거나 버리지 않고서 저 무생에 들어감이니 비유하면 물을 버리지 않고 습기를 취하며 불을 버리지 않고 열기를 취함과 같느니라. 물이 곧 습기요 불이 곧 열기이니라.

해설: 생사와 열반, 유주와 무주, 유와 무, 이 모두는 참나에 비친 환영이다. 무엇인가 티끌만한 것이라도 남아 있으면 그것은 참나에 비친 대상이지 참나가 아니다. 대상을 놓아버리고 주체인 참나로 돌아가는 것이 열반이요 해탈이요 무주이다.

외도는 나와 대상의 유와 무에 집착하여 생사에 떨어지지만 보살은 나와 대상 모두가 본래 없는 허상임을 알아 버리지도 구하지도 않는다. 천마 역시 나와 대상이 실체한다고 여겨서 선악을 분별하고 정사를 구분하므로 생사의 업을 지어간다.

그러나 보살은 선악, 정과 사, 모두가 업식의 환영이요 나 또한 환영임을 알아 나고 죽음에 걸림이 없으니 생과 무생이 본래 다르지 않음을 드러내 보이신다. 세상사 일체 만법이 모두 참나의 작용임을 일깨워준다.

본문: 이와 같이 생사가 바로 열반인 것이니라. 그러므로 보살이 생사를 버리지 않고 열반에 들어가느니라. 생사의 성품이 곧 열반이기 때문이니라. 생사를 끊어버리지 않고 열반에 들어가는 것도 불을 끊지 않고 열의 성품에 들어가는 것과 같느니라.

왜냐하면 생사의 성품이 곧 열반이기 때문이니라. 성문은 생사를 끊어서 열반에 들어가고 보살은 체성이 평등함을 알아서 능히 대비로써 사물에 동등하게 취하고 적용하느니라. 생사는 의미는 하나이지만 이름이 다르며 부동과 열반도 역시 의미는 하나이지만 이름이 다를 뿐이다.

해설: 꿈을 꾸는 동안에는 꿈속의 나와 너, 주체와 객체, 선과 악, 시간과 공간 등등 모든 것을 명색으로 분별하지만 꿈을 깨어서보면 모든 것이 꿈일 뿐이다. 해탈함은 생사의 꿈을 버리고 열반의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꿈을 깨는 것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분별하는 모든 것은 실체가 아닌 허상이다. 오직 이 모두를 비추어 아는 진여자성(참나)만이 실체한다.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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