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즐거움으로 여기더라도
행위에는 ‘인과응보’가 따르고
돌 흠은 자연스럽게 보이지만
‘옥에 티’는 큰 결점으로 보여
<증일아함경> 아수라품에 다음 글이 있습니다. “보시가 없을 때에는 받을 생각을 내지 말고, 보시가 있을 때에는 곧 소화하여 물들거나 집착하지 말라(未有信施 不起想念 以有信施 便能消化 不起染著).”
남이 주지 않는 것을 강제로 가지려고 하면 투도(偸盜)를 저지르게 됩니다. 중생계에서 주지 않는 남의 것을 탐하는 것은 비단 물질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심지어 타인의 가치 여부까지 넘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인간만이 남의 것을 욕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예를 들어 다른 쇠똥구리가 장만한 먹이만 노리는 쇠똥구리가 있다는 것을 TV를 보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주지 않는 것을 힘의 논리로 집요하게 강탈하려는 모습을 보면서 동족끼리 뺏고 빼앗기는 유사사례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축생계에서는 이것을 생존이라 하겠지만 인간계에서는 윤리적 판단이 따릅니다. 달리 말하면 행위에 과보가 있는 것으로 <보살영락본업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과란 우리가 짓는 선악이 인(因)이고, 그 때문에 받는 고락(苦樂)이 과(果)이다. 과(果)의 근거를 이루는 것이 인(因)이고, 인(因)을 근거로 생기(生起)게 되는 것이 과(果)이다. 이같이 근거와 생기가 서로 의존해 있는 것을 한데 묶어 인과(因果)라 한다(所謂因果 善惡名因 苦樂名果 所由爲因 所起爲果 由起相待 通爲因果故).”
원인과 결과의 연관성을 설명하면서, 행위가 초래하는 결과(由過去業因所招感之結果)를 일반적으로 ‘과보’라고 합니다. 여기서 ‘과거’는 ‘전생’으로 한정 짓는 관견(管見, 대롱 구멍으로 세상을 내다봄)이 아니라 인과의 이치를 밝히는 과정의 ‘과거’입니다. 그러나 결과의 원인(無因有果)이나 원인의 결과(有因無果)를 탐구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인과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부정(無因無果)하여 엉뚱한 주장(邪因邪果)을 펼치기도 합니다.
선한 원인에는 즐거운 결과(善因樂果)가 악한 원인에는 괴로운 결과(惡因苦果)가 있다는 인과응보의 이치는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명확합니다. 그러므로 투도로 인하여 받는 결과가 고통이라는 것도 역시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을 빈궁(貧窮)과 곤란(不得自在)으로 설명하는 경전이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타인의 풍요를 훔쳤으니 빈궁을 겪게 될 것이고, 남이 편리하게 쓰던 것을 슬쩍 가졌으니 곤란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인과응보의 가르침을 중생에게 납득시키기 위한 좋은 내용인 것 같습니다.
무엇이든지 처음은 서투릅니다. 설혹 좋은 것이라도 그럴 텐데 나쁜 것은 더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하는 기부행위도 처음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망설여지지만 막상 하다보면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식의 기부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후회 없이 할 뿐만 아니라 수월하게 이뤄집니다. 그렇듯이 자신의 탐욕을 위하여 저지르는 투도행위도 처음에는 가슴이 쾅쾅거리면서 발각될까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누가 쳐다보면 들킨 것 같아 후회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속적으로 하다보면 죄의식은 고사하고 쾌감을 느낄 것 같습니다. 심지어 남의 것이 자기 것처럼 보이고, 더 나아가서 그것을 가지는 것을 당연시 합니다.
만약 뭐든지 좋아서 하는 것을 즐거움이라 한다면 악행을 하는 입장에서는 투도도 즐거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스스로 즐거움으로 간주하더라도 인과응보의 이치에 따라 악한 행위에는 고통이 수반됩니다. 간혹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여 아이에게 먹일 음식을 훔치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법 논리 이전에 인지상정의 동정론이 있기는 하지만, 주변의 노력과 눈물을 빼앗아 세상을 속이려고 여기저기 선심을 쓰는 사악한 경우도 있습니다. 도덕관념이 부족하여 저지르는 거친 행동이 아니라 매우 교활한 행위입니다. 이럴 경우 앞에 ‘극(極)’자를 덧붙여 ‘극악’이라 합니다.
투도(不與而取)의 범위가 넓은 만큼 종류도 다양한데 <잡아함경> 화경의 내용으로 투도에 대한 단상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어떤 비구가 눈병이 나서 스승의 가르침대로 붉은 연꽃의 향기를 들이마시자 천신이 그 행위를 일러 도둑질이라 하였다. 그때 마침 연뿌리를 잔뜩 캐서 지고 가는 장정이 있어 그를 가리키며 그러면 저 행위는 무엇인가 묻자, 흰 옷이 작은 먹물방울에도 쉽게 더럽혀지듯, 청정한 이가 짓는 허물은 아무리 작아도 태산처럼 보인다(常從彼求淨 無結離煩惱 如毛髮之惡 人見如泰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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