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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법이야기

[스크랩] 불교의 깨달음 이란 무엇인가

좋을 때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여래의 측은한 마음(大悲)은 중생의 고통 때문이기에 불도를 이루고자 정진하는 것은 생사에서 벗어나는 도리(出離生死)를 설법하는 것입니다. 즉 달콤한 유혹에 빠져 괴로워하는 중생을 측은하게 여기는 부처님께서 고통에서 행복으로 가는 길을 보이고 가르치고 타이르는 것입니다. ‘안수정등(岸樹井藤)’에 나오는 나그네처럼 위급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넝쿨에 매달려 있으면서도 몇 방울의 꿀맛에 그만 취해 자신의 처지를 잊어버리는 것이 중생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무상살귀(無常殺鬼) 앞에서도 욕락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장미에 가시가 있는 것처럼 강렬한 유혹에는 독(번뇌)이 있다고 합니다. 유혹에서 혹(惑)은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으로 어리석어 알지 못한다(迷而不解)는 뜻입니다. 뭐든지 집착하면 실체를 제대로 알기 어려울 뿐 아니라 벗어나기도 힘든데 더군다나 유혹에 빠졌으니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어 버렸을지 모릅니다. 우스갯소리로 유혹을 판별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쳐다보는 것은 괜찮겠지? 냄새 맡는다고 별일 있을까? 맛만 살짝 본다고 탈이 나겠어? 하면서 접촉하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황홀하여 꼼짝 못하는 상태라면 그건 유혹에 빠진 것이라고 봐도 될 것입니다. 사전에서 ‘혹’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혹’은 ‘번뇌’와 같은 뜻이며, ‘무명’의 다른 이름으로 ‘신심이 번잡하고 어지러운 뇌란의 상태(身心惱亂之狀態)’나 ‘깨달음의 심적 작용을 방해(妨一切覺悟的心之作用)’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어디 한두 가지라야 억지라도 벗어나려고 하겠지만, 생각만큼 종류도 많을 것이고 무엇보다 한 번 중독되면 끌려 다니는 특징이 있습니다.

   
 

자유자재하게 좋을 때는 오고, 싫을 때는 오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오고가는 것을 자유롭게 하려면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아무리 크고 빠른 배라도 줄에 묶여있으면 자유로울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를 누가 구속하고 무엇이 속박하는 것일까요? 자기 스스로 굴레를 뒤집어쓰고 자신이 만들어낸 번뇌로 얽맨 것 이외에 그 무엇이 있을까요? 아무리 밖을 둘러보고 뒤져봐도 찾을 수 없다면 안을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를 간단히 말하면 자기 삶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이라서 그렇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신의 모든 행위를 ‘업(意志等身心活動)’이라 하면, 그 업에 따라 삶의 모습이 나눠지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업으로 생사하고 생사도 그 속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열반(涅槃)에 상대하는 생사(生死)를 달리 윤회(輪)라 하는데 끊임없는 생사를 바다에 비유하고 그 속에서 고뇌하는 것을 합해서 생사고해(生死苦海)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선악의 업인(業因)과 번뇌의 조연(助緣)으로 생사하는 것을 분단생사(分段生死)라 하고, 대비원력(大悲願力)으로 생사에 자유로운 것을 변역생사(變易生死)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라면 오고가는 것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이에 대하여 분분한 의견이 있을 수 있으므로 요약한 <법화경>의 글로 ‘왜 변역생사 하는가?’의 설명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여래께서 세상에 몸을 현현(顯現)하시는 것은 일대사인연을 위한 것(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으로, 중생으로 하여금 불의 지견을 열어(開) 청정함을 얻게 하고자, 불의 지견을 보이고자(示), 불의 지견을 깨닫게(悟) 하고자, 불의 지견에 들어가게(入) 하고자 세상에 출현하신다” 하셨으므로 ‘불의 지견(佛知見)’ 즉 부처님의 지혜로 보면 오고가는 것이 자유로울 뿐입니다.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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