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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법이야기

[스크랩] 집착하지 않을때 큰 공덕을 이룬다

인연을 따라 변화는 유위

생멸의 조건을 여윈 무위

 

현상 집착 않는 선행공덕

무량하여 헤아릴 수 없어

불사하는 것을 본 누군가가 “유위복이 아니라 무위복을 지을 것이지” 하였습니다. 뜻하지 않은 말에 “유위의 복이라도 지었을까?” 스스로 자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유위’(有爲)란 ‘짓다’(所作造作)는 뜻으로, 어느 선사는 인연(조건)을 따라 변화하는 유위의 복을 시어(詩語)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청정함이 뒤집혀 번뇌가 되고, 유위 공덕이 티끌에 덮였다(淸淨爲煩惱 有爲功德被塵).”

<금강경>에서 “모든 유위법은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같으니 이렇게 관찰할지라(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하며 유위의 본질을 바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같은 유위에 상대한 무위(無爲)는 열반(原係涅槃之異名)을 근거로 합니다. 즉 유위가 조작(因緣和合所造作之現象)이라면, 무위란 무조작(非由因緣所造作 離生滅變化)으로 생멸변화를 여윈 것입니다. 그러나 말로는 유위니 무위니 쉽게 할 수 있더라도 막상 공덕을 지으려면 쉽지 않을 텐데 양무제는 불심천자(佛心天子)로 칭송될 만큼 삼보전에 많은 공덕을 닦았습니다.

어느 날 무제가 달마대사에게 자신이 지은 공덕을 묻지만, ‘없다’는 말만 들었다는 이야기는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이 부분을 유루와 무루의 관점에서 잠깐 억측한다면 무제는 그동안 자신이 닦은 선행공덕을 은근히 달마대사에게 알리면서 인정받으려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작은 선행이라도 타인이 칭찬하면 신이 나서 더 열심히 하는 것이 중생심이고, 또 여러 경전에서도 선행(布施)과 청정한 행위(五戒)를 하는 우바새 우바이에게 부처님께서 “천상에 이른다” 하셨기 때문에 당연히 공덕이 많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달마대사가 무제의 물음에 거두절미하고 “무(無)”라고 한 것은 현상(用)에 집착하는 순간 번뇌가 따를 수밖에 없는 도리를 차례대로 설명(次第說法)하기보다는 본질(體)적 입장에서 단박에 천명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즉 선행에 따른 공덕의 유무를 거론하였다기보다 유루의 공덕(由有漏道之修行能暫時壓抑現行之煩惱 稱爲世間淸淨)을 논하는 무제에게 무루의 청정(由無漏道之修行能完全滅盡煩惱 稱爲出世間淸淨)을 바로 보이려 한 것입니다. 아무리 불심천자라 하더라도 진리에 예외가 낄 자리란 없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어서 “참다운 공덕이란 공적(淨智妙圓體自空寂)하며 번뇌(有漏)의 관점에서 구할 것이 아니다(不求於世)”며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제의 입장은 어떠하였을까요? 간단히 말하자면 많이 서운하고 의아하였을 것 같습니다. ‘서운하다’는 것은 힘써 행한 선행에 공덕이 없다고 한 부분일 것 같고, ‘의아하다’는 것은 공덕을 지으면 공덕이 따른다는 관념의 저항에 부딪혀서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무제는 겉으로 품위를 유지하면서 담담하게 “앞에 앉은 사람은 누구냐” 물었지만, 그 역시 “모른다(不識)”는 선(禪)적 표현의 대답만 들어야 하였습니다.

위와 같은 공덕문답 양식을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어떤 신심있는 불자가 공덕주가 되어서 자신이 지은 공덕에 대하여 스님에게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물었을 때 한마디로 “없다”는 말을 듣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여러분이라면 어떻습니까? 공덕을 지어도 공덕이 없다고 한다면 계속 공덕을 지으려고 할까요. 어쩌면 이 부분에서 유루복과 무루복으로 갈릴 것 같은데 하여튼 중생심이라면 어렵겠지만 보살심이라면 가능하다고 여러 경전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보살은 일체에 고정된 실체인 자성(固定之實體)이 없다는 무자성(諸法皆因緣所生 故無自性)의 공(空)을 체득(契合)하였으므로 공덕짓는 선행(바라밀)을 부처님처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불보살님은 성불(成佛)의 원(願)을 세워서 선행공덕을 닦으며(因位), 깨달음을 성취하였어도(果位) 여전히 공덕을 쌓고 자비를 베푸나 탐착하지 않는 것을 <금강경>의 표현을 빌리면 ‘상에 머물지 않고, 상에 집착하지 않는 것(不住於相 不取於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공덕의 바른 의미는 다음의 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만일 보살이 현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느니라(菩薩無住相布施福德 亦復如是 不可思量).” 그러면서도 행여 이 말에 또 집착할까봐 대비심(大悲心)에 거듭 “법에 집착해도 안되고, 법 아닌 것에 집착해서도 안된다(法尙應捨 何況非法)”고 하였습니다.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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