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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법이야기

[스크랩] 무상과 무아를 내려 놓자

수행자에게 ‘중한 것’은 다릅니다. 수행자는 ‘자기를 아는 것’이 중합니다. 무엇이 중하냐, 무상(無常), 무아(無我)를 알고 사는 것과 모르고 사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불교를 접할 때 처음부터 너무 크게 듣고, 보려고 합니다. 번뇌가 없어지는 그 자리가 깨달음의 당처입니다. 깨달음을 따로 구하려고 하니 너무 크게 듣고, 볼려고 합니다. 이는 땅의 길을 두고 하늘 길부터 가려는 것과 같고, 손발을 접고 몸통으로 날으려는 격입니다. 처음에 불교를 접할 때 잘못 접하면 일생을 헤매게 됩니다.

수행은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에 가는 것이며, 그곳으로 가는 길에 있는 장애물을 하나씩 걷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으면서, 양심과 모순된 야망의 삶을 영위해 가려는 이중적인 삶 때문에 갈등과 회의, 절망, 좌절합니다. 이것은 오탁악세(五濁惡世)이자 중생의 세계입니다. 이 모순된 삶을 영위해 나가려하지 말고 무상과 무아를 먼저 내려놓아야합니다.

참선법은 지식, 상식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온 몸으로 체득해야 합니다. 온몸으로 체득하여 무명업장을 몰록 소멸하고 확철대오해야 합니다. 그랬을 때 번뇌와 보리가 하나가 되고, 걸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중생계에 당하고 있는 현실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고 행복한 미래의 전망을 제시하는 통찰력을 가지려고 수행하는 것입니다. 중생세계를 정토화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마타라는 집중력과 관찰(사띠)이 겸수되는 참선의 길이 잘 사는 길입니다. 무엇이 중하냐는 것은 알고 가는 것입니다. 참선수행에서 어려운것이 혼침입니다. 이는 알아차림으로 극복해야하겠습니다. 진짜수행은 자기가 증득하고 체득해야 합니다.

어느 스님이 운문선사에게 묻기를 ‘나무가 말라 낙엽이 떨어진 뒤는 어떤 경계입니까.(樹凋葉落時如何)’ 그러자 운문선사가 답하기를 ‘체로금풍(體露金風)이니라’하셨습니다. 이는 ‘본질이 다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온갖 번뇌망상, 무상, 무아의 모든 것이 탈각되어서 자기생명의 본래자리에 들어선 참사람은 따로 볼 것이 없습니다. 본 고향인 본래면목에 들어섰으니 한순간도 실체가 없습니다. 만법은 생각에서 나온 허상이며 참 내마음은 시공을 초월해 영원히 이런자리를 증득한 그 자리입니다. 한순간도 실체가 없어 백천대겁과 통해 있고, 대겁도 실체가 없어 한순간 순간을 포용합니다. 이를 터득(實參實悟)하면 세상을 자유자재하게 살 수 있습니다.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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