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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법이야기

[스크랩] 우린분절 영가 천도에 대하여

흔히 윤회를 얘기하면 어떤 사람들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비웃거나 냉소적인 반응을 먼저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는 과거에 지녔던 낡은 종교관으로 인해 비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면에 윤회를 좀 알고 있는 경우에도 확신이 부족해 어정쩡한 관점을 보이는 이들도 있습니다. 윤회를 부정하는 것은 종교적인 신념에서 볼 때, 그렇게 합리적 교육수준이나 지적 교양의 영역은 아닙니다. 이는 오히려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결여된 점을 드러내는 영역입니다.

윤회를 부정하면 어떤 인식의 한계에 부닥칠까요. 간단히 보더라도, 윤회가 부족하면 인과를 부정하게 되고, 그 인과를 부정하면 매우 위험한 인생관에 빠지게 되는 상황을 접할 수 있습니다. 이는 자신이 어리석음에 직면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연의 생태원리에서 보듯이, 콩 심은데 콩이 나오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와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콩을 심고 팥을 기대하는 것은 잘못된 마음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자라면 반드시 윤회와 인과법에 대한 혁신이 있어야 합니다. 윤회를 믿지 않으면서 과거가 어디에 있고 미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윤회가 있기에 우리 인생은 길을 찾아서 올바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노력하는 삶의 자세를 갖출 수 있고, 잘못된 삶을 바꾸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현상은 윤회의 법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대만 불광사의 성운법사가 말한 <마음의 비밀>이란 법문집에서는 ‘윤회’에 대한 명쾌하고도 시원한 해석이 나와 있습니다. 간단히 옮겨 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의 변화도 윤회요, 우리 몸을 유지하기 위해 섭취하는 음식의 소화과정과 배설도 윤회요,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해야 하는 일상도 윤회요, 여기-저기-이곳-그곳의 동서남북의 방위 변환도 공간의 윤회입니다. 더 크게는 바람과 구름이 엉켜 일정한 온도를 만나 비가 되고, 땅에 내렸던 빗물은 햇빛에 증발돼 수증기로 변해서 구름층을 이루고 구름은 다시 비로 변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액체-고체-기체의 순화과정도 자연의 윤회현상입니다.”

이러한 우주의 물리적 변화도 윤회이지만, 인생의 생로병사도 윤회입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이 과정도 윤회이며, 우리 마음속의 회로애락 작용도 윤회인 것입니다. 중생은 생각이 짓는 힘, 즉 마음의 움직임이라 말하는 업력에 의해서 시작도 끝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생명 흐름이 형성되고 있으며,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사람(人) 하늘(天) 등 모두가 다양한 생명현상으로 작용되는 이것이 바로 불교의 육도 윤회입니다.

고단한 우리의 삶을 감당하기 힘겨운 어떤 분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 난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삶에 실패했다고 단정하고 자살을 꿈꾼다면, 그 죽음 또한 실패한 죽음이라고 지칭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자살이 점점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서 ‘자살’을 거꾸로 말해 보십시오, ‘살자’가 되잖아요. 우리네 삶과 죽음은 그만큼 서로 동떨어진 것이 아니고, 동전의 양면처럼 늘 함께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현재의 삶을 잘 가꾸어야 죽음도 당당히 맞이할 수 있습니다. 자살을 불교적으로 한번 봅시다. 불교에서 자살은 엄청난 죄악입니다. 삶은 죽음의 연속이고, 죽음은 삶의 전환일 뿐입니다. 윤회의 씨앗이 되는 우리의 업식이란 것은, 그렇기에 살아있을 때 잘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왜 ‘사바세계’라고 표현했을 까요. 왜 감토(堪土)라고 했으며, 왜 인토(忍土)라고 하셨을까요. 참고 견뎌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부처님이 사바세계라고 표현하신 겁니다.

윤회의 주체인 ‘나’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오온(五蘊)인 색수상행식이 현재의 ‘나’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다섯 가지의 집합체가 ‘나’라는 것입니다. 서구의 종교와 철학에서는 인간을 이원론적으로 육체와 정신으로 구분했습니다. 그리고 정신은 다시 감성과 이성으로 보았고, 육체는 육체의 각 부분이 합해진 것으로 보았습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을 색수상행식 이 다섯 가지의 집합체로 좀 더 구체적으로 해석했습니다. 이제 이를 개별적으로 분석해 보면, 그 중 그 어떠한 것도 항상 영원한 것이 없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므로 이를 무상(無常)이라 합니다. 또 고정된 실체가 없는 의미로서 무아(無我)라는 표현을 ‘참나’로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윤회사상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무아사상과 서로 모순되지 않는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삼법인 중에 제법무아는 모든 것이 고정불변한 자성이 없다는 의미인데, 무엇이 윤회를 한다는 말인가하고 의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본래 무아라는 말은 생명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몸의 구성원인 5온은 4요소의 가합으로 이뤄진 것으로 인연소생이기 때문에 본래자성이 없어서 무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실제로 윤회하는 것은 우리 육체가 아니라 이 몸 안에 있는 주인공들인 마음 영혼 말라식 등이 윤회의 근본 주체인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떠날 때 가장 나중에 육신이 떠나고, 태어날 때 가장 먼저 세상에 나오는 놈이 바로 이 육신입니다.

우리 몸이 저 세상으로 가는 게 아닙니다. 이 몸뚱이(色)가 소리(聲)를 듣고 냄새(香)를 맡고 맛(味)을 느끼고 촉감(觸)을 알지만, 이 육신이라고 하는 것은 때가 되면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벗어 버려야 하고, 벗어나면 너나없이 영가가 될 것입니다. 영가라고 해서 두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세상인연이 다해서 다른 생명활동으로의 이동에서 반드시 영가가 되어야 할 사람들인데, 영가가 되는 것을 두렵게 생각해서야 되겠습니까.

무아와 윤회는 결코 서로 모순되는 사상이 아닙니다. 금덩어리가 여러 형태의 금붙이로 만들어지더라도 황금의 본질은 변하지 않듯이 우리의 생명 또한 인연이 다해서 어느 순간에 업력에 따라 삼악도에 갈 수도 있어, 인간계와 천상계를 오고가며 윤회의 삶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윤회는 생명현상입니다. 물이 고여만 있고 흐르지 않으면 썩어 버리듯, 모든 자연현상, 생명현상은 변하기 때문에 괴롭기도 하지만 변하기 때문에 희망도 있는 것입니다. 이번 계사년 우란분절 기도를 스님들에게만 맡기지 마시고, 우리 마음자리를 맑게 닦아나가는 그런 시간으로 만들어 보십시오,

현재의 인연을 소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가족 간의 인연, 주변사람들과의 인연, 모든 인연이 소중한 인연이란 것을 깨닫는다면 바로 마음이 맑아지고 기도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재앙은 사람들 마음이 균형을 잃고 어리석게 잘못된 판단을 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욕심과 이기심에 가득찬 사람은 화엄성중도 외면한답니다.

마음이 맑아지면 우리의 과거생이 어떤 모습이었으며 어떤 몸을 받아 살았었는지를 알 수 있겠지만 실제로 여러분이나 저나 아직 전생을 알지는 못합니다. 이번 백중기도 기간에 광명진언을 사경하기로 한 것은 조상천도에 앞서 한 마음 밝히고자 하는 간절한 염원 때문입니다. 선사들의 말씀을 보면, 진언이든 참선이든 수행에 깊이 들어가서 내 마음의 어둠을 녹여버리면 그 순간에 온전히 밝은 마음이 곧 부처님 마음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마음이 맑은 사람은 그 자체가 광명 덩어리이기 때문에 이런 사람의 주변은 좋은 것, 밝은 것으로 둘러싸여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광명의 힘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한마음 밝히는 공덕이 이렇게 대단할진데 명부의 저승길도 어둠의 긴 터널이 아니라, 밝은 광명의 길로 펼쳐진다면 인연이 다해서 오는 죽음이 무엇이 두렵고 고통스럽겠습니까.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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