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제선인 경우가 바로 보살의 인욕
참음 아니라 상대 행동 견디는 것<慈忍>
참고 견딘다는 뜻의 ‘인욕’은 정말 쉽지 않으니 그 이유는 언제까지 참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끝까지’ 참아야 합니다. 갈등이 잠잠해질 때까지 마냥 참아야 합니다. 왜 참아야 하냐고 물어도 대답은 빤합니다.
“울컥 하는 심정에서 치고받으면 상대편이 또 다시 내게 덤빌 것이요, 그러면 이 갈등이 또 되풀이될 테고, 그러면 당신의 번민은 끝이 없을 테니까.”
그러니 인욕은 단순하게 말해서 ‘갈등과 다툼이 무익하고 지긋지긋하다’고 먼저 깨달은 사람이 실행해야 할 법입니다.
더 이상 손익을 따지지 않고 내 쪽에서 먼저 멈추겠다. 외나무다리에서 서로 멱살을 잡고 버티다가 내가 먼저 손을 놓겠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상대방이 계속 도전적으로 나선다 해도 나는 묵묵히 상대방의 온갖 모욕과 비방과 심지어는 구타까지도 견디는 것입니다.
단, 꼭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참을 때 분한 마음이 솟구친다면, 이건 진정한 참음(인욕)이 아닙니다. 오직 상대방을 향해 자애의 마음이 넘쳐흘러 그 힘으로 상대방의 행동을 견디는 것(慈忍)입니다. 가령 찬제선인과 같은 경우가 바로 보살의 인욕입니다.
아주 오래 전, 찬제(提)라는 이름을 가진 수행자가 우거진 숲에서 인욕을 닦고 자비를 실천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숲으로 왕이 아름다운 궁녀들과 나들이 왔다가 홀연히 낮잠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왕이 잠들자 궁녀들은 삼삼오오 숲속을 거닐었습니다. 그러다가 커다란 나무 아래에 단정하게 앉아서 명상하고 있는 수행자를 발견하고, 그 모습에 깊이 감동을 받아 모두 앞으로 몰려갔습니다.
수행자는 궁녀들에게 늘 마음에 자애를 품고 온갖 괴로운 일을 참고 견디라는 법문을 들려주었는데 그 음성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궁녀들은 넋이 나간 채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낮잠에서 깨어난 왕은 궁녀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곁에 있지 않자 불안한 마음에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하여 숲속의 수행자에게 법문을 들으며 서 있는 궁녀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순간 왕에게는 질투심이 솟구쳤습니다. 그는 다짜고짜 수행자를 향해 칼을 빼어들고 외쳤습니다.
“대체 뭐하는 자냐?” “나는 인욕을 닦고 자애를 실천하고 있소.”
왕은 비위가 상했습니다. 인욕이니 자애니 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요, 자신의 궁녀들을 꾀여서 희롱하고 있던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에 그는 칼을 휘두르며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이 칼로 그대의 코와 귀와 손발을 자르겠다. 그래도 내게 화를 내지 않는다면 그때 그대가 진정으로 인욕을 행하고 있는 중이라는 걸 인정하겠다.”
설마 했지만 왕은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습니다. 하지만 수행자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자, 이래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가?” “나는 자애와 인욕을 닦기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소.”
왕은 코웃음을 치며 물었습니다. “네 마음이 그렇다고 누가 증명하지?” “내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지금 흐르고 있는 붉은 피가 하얀 젖이 될 것이오.”
수행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피는 젖으로 변했습니다. 왕은 지독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둘러 궁녀들을 데리고 숲을 빠져나갔지만 진실한 수행자를 겁주고 해친 까닭에 도중에 죽고 말았습니다.(<대지도론>제14권)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마음에 자애로 가득 찼다는 대목입니다. 우리를 번거롭고 속상하게 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 마음에 분노나 원한이 아닌, 자애로 가득 찼다는 것. 인욕은 그냥 버티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따뜻한 자애의 마음과 시선으로 상대를 견디는 것입니다.
'불교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깨달은 자에게는 죽음은 여일 하다 (0) | 2013.09.22 |
---|---|
[스크랩] 무소유 의 수행자 (0) | 2013.09.04 |
[스크랩] 부처님은 어떤 삶을 살았는가 (0) | 2013.08.23 |
[스크랩] 진실 바탕 삼아 깨뜨리고 뚫는 능력 (0) | 2013.08.14 |
[스크랩] 불교 기초의례 예불문에 대하여 (0) | 2013.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