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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법이야기

[스크랩] 공공적적한 마음 무소유

무엇도 가질 수가 없어 무소유<無所有>

공공적적한 마음경지 체험해야

법문 : 혜능 대사의 게송에서 나온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거니, 어느 곳에 티끌 먼지 있으리오.’ 이 말은 신수스님의 게송에서 거울을 닦으라고 한 점수법과 대비된다.

신수스님도 물론 돈교법과 돈오법을 잘 알지만 중생을 위해 법을 펼 때는 항상 자비심으로 점수법을 설했다. 점수와 돈오법의 차이는 참선을 하든, 진리를 배우든, 경학을 보든 내가 본래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부처로서 부처의 모습을 자각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돈법이고, 부처가 되기 위해 닦음을 세우는 것은 점수법이다.

신수스님은 중생이 업을 붙들고 있어 업의 습관에 의해 고통과 갈애를 짓는다고 보고 이를 없애는 내용으로 게송을 지었다. 거울을 닦으라는 한 구절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신수스님은 게송에서 16자의 한자로 이를 함축했는데,

‘응심입정(凝心入定) 주심간정(住心看淨) 기심외조(起心外照) 섭심내증(攝心內證)’이 그것이다.

   
 

여기서 ‘응심입정’은 마음을 한 곳에 모으니, 마음이 고요해져서 청정한 공(空)을 본다는 뜻이다. 이어 ‘주심간정’은 여기서 간(看)은 세밀하게 살핀다는 뜻이다. 즉 사물의 경계를 잘 간(看)한다는 것이다.

사물을 보는 것도 마음이 형상을 보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만상(萬相)은 인연의 관계가 끝나면 결과적으로 마음과 현상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분별을 한다는 것은 분별 끝에는 반드시 분별해야 할 분별심이 또 있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선(禪)에서는 항상 분별 식심(識心)을 끊어야 한다고 하는 절관(絶觀) 사상이 있고, 이 절관 사상은 우두법융 선사가 설했는데 이것은 바로 도신대사의 선(禪)사상을 받은 것이다.

또한 ‘섭심내증’은 마음을 모음에 의해 조작에 의해 증득하는 것을 깨닫게 됨을 말하는데, 여기에서 거울에 먼지가 끼면 닦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닦음이 나온 것이다.

이러한 점수 수행법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중생 근기에 맞춘 적절한 대치 수행법이다. 점수법과 혜능의 돈수법하고 비례해서 혜능의 돈수법은 차별화가 된다.

조사선은 본래 돈오돈수다. 조사선에 대한 <단경>의 요체는 마음이란 것이 본래 공적하다는 것이다. 이로써 참선수행은 결국 공적영지(空寂靈知)를 체험하는 것이다.

마음이 공적함을 체험하는 것이 근본으로, 그 마음이 공적했기 때문에 거기에 무수한 번뇌가 일어났다 하더라도 일어난 것이 아니다. 체성이 없는 생각의 생멸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무생(無生)이라고 한다.

비유하자면 마음은 허공과 같은데 허공에다 무엇을 세우고 무엇을 붙들 수 있으며, 무엇을 멈추게 할 수 있는가. 이 일의 본질을 혜능은 바로 꿰뚫어 본 것이다. 마음이 텅 빈 공심(空心)은 절대적으로 오염시킬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본래 망상이란 실체가 없는 것인데, 스스로 어두워 미혹을 집착해서 망념이 있다고 이것을 닦아야 한다고 보는 것이기에 혜능은 맞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공공적적한 텅 빈 마음에 망념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사실은 없는 것이라서 무생(無生)이라 한다. 허공에는 무엇도 가질 수가 없으므로 무소유(無所有)라 한다.

허공 그 자체이기에 허공 밖에서 들어올 수도 없고, 그대로 허공 자체라서 허공 바깥은 없다. 허공은 어떻게 할 수 없다. 마음은 본래 무엇을 얻는다는 것도 맞지 않고, 허공은 소유할 수 없으며, 허공은 본래 청정하다는 것도 세울 수가 없다. 그래서 마음의 공공적적한 경지를 체험해야 된다.

이것을 바로 보는 것을 정견이라고 한다. 정견은 법을 바로 보는 안목이고, 체험해서 자기화돼서 그대로 생활에 잘 쓰면 바로 종지를 체득해서 실행하는 것을 <단경>에서는 반야바라밀행이라고 한다.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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