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상 지으면 전부 잘못된 것
미혹한 사람은 法 모양에 집착
해설 : <단경> 본문을 다시 보자.
“만약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옳다고 한다면 사리불이 숲 속에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을 유마힐이 꾸짖었음이 합당하지 않느니라.”
“선지식들이여, 또한 어떤 분이 사람들에게‘앉아서 마음을 관찰하고 깨끗함을 관찰하되 움직이지도 말고 일어나지도 말라’고 가르치고 이것으로써 공부를 삼게하는 것을 보나니, 미혹한 사람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문득 거기에 집착하여 전도(顚倒)됨이 수백 가지이니, 이렇게 도를 가르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애써 알아야 하느니라.”
“선지식들이여, 정과 혜는 무엇과 같은가? 등불과 그 빛과 같으니라. 등불이 있으면 곧 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빛이 없으므로, 등불은 빛의 몸이요 빛은 등불의 작용이니, 이름은 비록 둘이나 몸은 둘이 아니니, 정과 혜의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여기서 ‘앉아서 마음을 관찰하고 깨끗함을 관찰하되 움직이지도 말고 일어나지도 말라’고 가르친 것을 두고“이렇게 도를 가르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애써 알아야 하느니라”라고 말한 대목은 <단경>에서 북종 신수의 점수를 비판하는 대목이다. 육조의 마음과 북종선의 닦는 마음은 차이가 있다. 육조의 마음은 본래 마음이 공적한 것이고 본각이다. 본각이란 말은 새로운 말은 아니다. <화엄경> 여래출현품에 나온다. ‘일체중생이 부처님과 다 같은 덕성을 갖추었구나, 참 놀랍구나’란 대목이 그것이다. 혜능의 말은 대승경전 사상을 그대로 단순화 시킨 것이다. 그대로 실천이 용이하도록 정리정돈을 한 것으로 어록의 묘미가 살아있다. 본래 본각이기에 허공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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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달리 ‘무엇을 관하느냐’고 하는 북종에서는 관(觀)하면 관하는 대상이 있고 대상이 있는 것이라서 양변으로 벌어진다. 무념(無念)은 양변이 없다. 그러나 생사 열반이 갈라서면 양변이 된다. 마음을 관찰하고 깨끗함을 관찰하고, 그 마음을 깨끗이 관찰하라고 하면서 닦으라고 하면 관하는 대상이 곧 양변으로 벌어진 것이라서 일심(一心)이 아니다. 일심은 그 대상이 없다. 작용으로 나올 때 작용으로 펼쳐질 뿐이다.
좌선 수행에서 움직이지도 말고 일어나지 말도록 해서 좌선위주로 가르치는 경우가 많다. 수행은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座臥 語默動靜)이 모두 수행이다. 수행이나 참선에서 좌선은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데 도움되는 과정이지 좌선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좌선이 수행 전체는 아닌 것이다. 그렇게 하면 좌선의 정의에 장애가 생긴다. 그래서 좌선에 국집해 버리면 본래 좌선의 의미를 그릇되게 만드는 것이다.
좌선만 문제가 아니라 머리에 어떤 분별상을 짓는 것은 전부 잘못된 것이다. 북종선의 간심간정(看心看淨)은 잘못된 것이라고 <단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단경>은 “미혹한 사람은 법의 모양에 집착하고 일행삼매에 국집하여, 곧은 마음은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고 하며 망심을 제거하여 일으키지 않음이 일행삼매라고 하나, 만약 이와 같다면 이러한 법은 무정(無情)과 같은 것이니 도(道)를 장애하는 인연이니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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