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아 수행함 말로 다툼에 있지 않아
마음 삼계에 드러나지 않는 것이 좌선
자기 내면에 반조해서 공공적적한 사상을 스스로 자각하고 말해야 한다. 이것이 언행일치이다. 승가의 법력은 안거보다도 언행일치에서 나온다. 언행일치가 법력이고 곧 수행력이다. 또한 공공적적을 무주(無住)라 한다. 그렇게 해야 치우침이 없다.
북방불교에서는 <대승기신론>의 실천 구조를 그대로 받아들여 일심이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으로 되어 있어, 닦아서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는 인도 전통불교를 그대로 단순화시켜서 계정혜 삼학으로 설명하는 방식이다.
![]() |
||
<단경> 본문을 다시 보자.
“스스로 깨달아 수행함은 말로 다투는데 있지 않으며, 만약 앞뒤를 다투면 이는 곧 미혹한 사람으로서 이기고 지는 것을 끊지 못함이니, 도리어 법집과 아집이 생겨 네 모양(四相)을 버리지 못함이니라.”
‘자성 가운데 그릇됨이 없으면 그것이 계(戒)이고, 자성에서 어지러움이 없으면 정(定)이며, 어리석음이 없으며 혜(慧)이다.’
이렇게 계정혜 삼학이 자성에 근본을 두는 것으로, <금강경>에서는 ‘반야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이 아니기에 반야바라밀이다’고 했다. 이는 인연상(因緣相)을 보는 것으로,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이다’는 게송과 같은 의미이다. 비상(非相)이면 진공묘유로서 평상심이 살아 나온다.
정견이 서면 이해가 가고 이치가 돌아가게 되어 있다. 경전을 보는 순간에 관심(觀心)으로 공적한 자리를 제대로 봐 버리면 행동도 법에 맞게끔 나온다.
<유마경> 제자품에서 사리불이 유마에게 혼나는 장면이 나온다. 유마거사가 좌선에 대해서 물은 것의 답은 ‘좌선이란 몸과 마음이 삼계에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무상(無相) 무주(無住) 사상을 드러낸 <단경>에서는 이를 무념(無念)이라고 하고, 무념이 무심(無心)으로 바뀐다. 그렇게 체(體) 그대로가 용(用)이다.
‘마음이 삼계에 드러나지 않는 것이 좌선’이라는 말은 부처가 부처인줄 모르는 것을 말한다. 비유를 하면, 마치 온 세상이 모두 광명으로 밝으면, 밝다는 개념과 또한 밝다는 말이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설법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좌선은 마음을 다스리는 과정이다 (0) | 2013.12.26 |
---|---|
[스크랩] 계.정.혜. 삼학에 대하여 (0) | 2013.12.16 |
[스크랩] 깨달음의 대화 (0) | 2013.12.08 |
[스크랩] 마음을 돌이킨 그 자리가 정토요, 극락이다 (0) | 2013.12.08 |
[스크랩] 나도 몰으는 내마음 (0) | 2013.1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