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의단 터져 내외명철해지면
그 어떤 말에도 속지 않게 될 것
그러므로 “도는 무심히 사람에게 합하고, 사람은 무심히 도에 합한다”고 하였으니, 스스로 나는 체득한 사람이라고 자랑하려 해서야 되겠는가? 살펴보건대, 본분종사들은 사람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으려 하였는데, 사람들이 그 스님을 ‘배울 것이 끊겨 함이 없는, 옛사람과 짝이 될 만한 참도인’이라 부르게 된다.
완전히 꿈에서 깬 사람은 더 이상 꿈을 말하지 않는다.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아직 꿈에서 덜 깼다는 증거이다. 꿈을 깨고 훤출하게 벗어났다면 잠꼬대와 같은 흔적이 없어야 된다.
인연 따라 남을 일깨울 수 있는 수단, 즉 위신력을 지녔다 할지라도, 참도인이라면 스스로 삼가고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된다.
그런데 공부를 조금 했다고 해서 쓸데없이 드러낸다면, 어느 귀신이 잡아갈는지 알 수가 없다.
덕산스님이 하루는 공양시간이 늦었는데 발우를 들고 방장실에서 내려오자 설봉스님이 말하였다.
“종도 울리지 않고 북도 치지 않았는데 발우를 들고 어디로 가십니까?”
그러자 덕산스님은 머리를 푹 숙이고 그냥 되돌아가버렸다.
암두스님이 이 말을 듣고 말하였다.
“가엾은 덕산스님이 말후구(末後句)도 모르는군.”
그러자 덕산스님이 물었다.
“그대는 노승을 긍정하지 않는가?”
암두스님이 이윽고 은밀히 그 뜻을 사뢰니 이튿날 덕산스님이 법좌에 올랐을 때는 평상시와는 전혀 달랐다.
암두스님은 손뼉을 치면서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기쁘도다. 덕산 늙은이가 말후구를 알아버렸네. 그렇기는 해도 앞으로 3년밖에 살 수 없도다.”
‘말후구’에 관한 직선적인 대화가 있다. 어떤 스님이 말후구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방장스님을 찾아가 물었다.
“무엇이 말후구입니까?”
“오늘 나는 바빠서 너에게 일러줄 수 없으니, 한주(閑主) 스님한테 가서 물어라.”
그래서 한주 스님을 찾아갔더니, 마침 나무하러 가고 없었다. 한참을 기다리다 보니, 이윽고 한주 스님이 나무를 한 짐 지고 산에서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이 스님이 얼른 손 씻을 물을 떠다가 드렸더니, 한주 스님은 아무 소리도 없이 손발을 씻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음이 조급해진 스님은 손발을 씻는 그 자리에서 대놓고 물었다. “무엇이 말후구입니까?”
그러자 한주 스님은 손발 씻던 물을 그 스님의 얼굴에다 확 끼얹으며, “이것이 말후구다” 하고 말하는 그 순간에 깨달았다고 한다.
흔히 마음자리를 ‘말후구’니, ‘최초구(最初句)’니, ‘일구(一句)’니 하고 부르지만, 알고 보면 실상은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근본을 의심하던 의단이 터지면서 내외가 명철해지면, 이와 같은 말은 물론 그 어떤 말에도 속지 않게 될 것이다.
이 공안을 총림에서 알음알이로 아는 경우는 매우 많지만 정확하게 뚫은 자는 드물다. 어떤 사람은 “참으로 이 구절(此句)이 있다”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아비와 아들이 서로 부르고 화답하지만 실로 이 구절은 없다” 하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은 비밀스럽게 전수해야만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두는 말로만 이해한 것으로 기로(機路)만을 늘리는 것을 면치 못하리니, 본분도리와는 거리가 대단히 멀다 하겠다. 이 때문에 “으뜸가는 제호(醍)의 맛은 세상에서는 진미이지만 이런 사람을 만나면 도리어 독약이 된다”고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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