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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법이야기

[스크랩] 원력 세우지 않고 하나도 이루어 진것이 없다

 

 

자꾸 사유해야 망상 안피워

원력 아니면 본성 볼 수 없어

원각은 공공적적(空空寂寂) 소소영영(昭昭靈靈)해서 그 완전한 진공묘유의 자리에서는 구름 걷히고 관자재가 이뤄지지만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원력을 붙들고 가는 길 밖에 없다. 그래서 원력이 생명줄이다.

원력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내 경험에 비춰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내가 어릴 적 노스님으로부터 요새 젊은 스님들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원력종자가 없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원력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 ‘생로병사타파 일체중생 제도’라고 말해. 나도 왜 출가했는가 하고 물으면 자연스럽게 ‘생로병사타파, 일체중생제도’라고 답하는데 사실은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고 관념적으로 답하게 된다. 왜냐면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의문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력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속정이 일어나 그것 때문에 지독한 고통을 겪고 그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서 법을 알아야겠다는 간절한 염원을 일으키는 과정을 거쳐서 일어나는 것이다. 즉 중생고가 원력으로 모양을 바꾸면서 피어난다. 우리가 생사해탈 일대사를 해결하겠다는 자긍심을 갖고 출가해서 철저하게 살아가는데, 부모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이런 속정이 일어난다. ‘한 집안에서 승려가 나오면 구족(九族)이 생천(生天)을 한다는데 내 수행력에 의해 부친이 승천 했을까.’ 이런 게 중생심이다.

그런데 자신을 돌아보니 내 주제로는 어머니가 도솔천에 가실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번뇌가 되어서 고통이 커지면 ‘아, 내가 정말 공부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어머니를 도솔천에 나게 해야겠다’는 원력을 세우게된다. 속정이 고민을 낳고 고민이 깊어지면서 성불을 해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을 공부해야겠다는 원력을 세우게 된다. 이처럼 고통을 발심으로 자꾸 연결시켜야한다. 한 번에 되는 것이 아니고 자꾸 생각을 일으키면서 생각을 그 쪽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고(苦)가 발심으로 승화되는데 원력이 그 역할을 한다. 원력이 서면 공부를 매섭게 하게 되고 법으로 승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또 하나 예를 들면 사람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세속에서처럼 승가에서도 선물을 주고 받고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그런데 정이라는 것은 지속되지가 않아. 결국에는 이런 저런 섭섭한 일로 인해 틀어지고 때로는 적이 되기도 한다. 세속에서야 모르겠는데 도반 사이에서 일어나니 고민이 깊어진다. ‘출가한 이유가 이고득락(離苦得樂) 하기 위해서이고 부처님 가르침은 중생의 고통의 끈을 잘라주는 것이 본분상인데, 나는 왜 어제 좋던 도반을 미워하게 되고 좋은 인연과 끊어져 적이 되는가. 법복을 입은 내가 왜 이런가’ 하는 고뇌가 온다.

이처럼 수행자는 자꾸 사유를 해야 한다. 사유도 할 만큼 하면 더 이상 망상을 안피우게 된다. 사유하는 특정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일상에서 현장 그 자리에서 바로 사유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유가 깊어지고 오래 계속되면 기운이 빠져 밥도 싫고 말도 하기 싫어진다. 이렇게 계속가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중생심이 생겨서 내가 왜 이 고통에 빠져 살아야하나 일단 살아야겠다는 마음에 고통에서 빠져나온다. 왜냐하면 분별심으로는, 중생 식심(識心)으로는 고민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되기 때문이다. <법화경>에도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해달라는 사리불에게 ‘아라한의 머리 능력으로 법화의 세계를 알려고 하지 말라’고 하는데, 식심으로는 안되기 때문이다. 고통이 아니라 처해있는 상황과 여건을 즐기고 기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하며, 그 눈이 정견이다. 이처럼 고통의 자리에 원력을 넣어 원력으로 수행을 지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원력 세우지 않고 이뤄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나는 이 원력이 내가 수행한 경험에서는 절대적이고 수행해나가는데 전부라고 본다. 원력이 아니면 이 일은 갈 수 없고 원력이 아니면 이 일은 우리 본성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항상 원력이 중요하다.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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