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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이야기

[스크랩] 예배 의 참 뜻

 

 

부처님과 불법에 귀의는 곧 ‘참나’ 귀의

욕망 집착 내려놓고 ‘참나’ 비추어 예배

본문: 예배(禮拜)란 항상 법답게 하는 것이니 반드시 이치의 본체는 안으로 밝으며 사물의 겉모습은 밖으로 변하니 이치를 버릴 수 없거니와 일에는 드러난 것과 숨은 것이 있느니라. 이러한 의미를 이해해야 비로소 법에 의지한다고 말 할 수 있느니라. 대개 ‘예(禮)’라고 함은 공경한다는 뜻이며 ‘배(拜)’라고 함은 굴복한다는 뜻이니, 즉 참 성품을 공경하고 무명을 굴복시켜야 비로소 예배라고 하느니라. 공경하기 때문에 헐뜯지 못하고 굴복시켰기 때문에 방종하지 못하니 만일 악한 생각이 영원히 멸하고 착한 생각이 항상 존속하면 비록 겉모습으로는 나타나지 않으나 항상 예배하는 것이니라. 그 모습이란 몸으로 나타내는 모습이니 모든 세간의 중생들로 하여금 겸손한 마음을 드러내게 하려고 했기 때문에 반드시 몸을 굴복시키고 공경하는 모습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

 

해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마음의 표현이다. 마음이 생각으로, 언어로, 행위로 드러난다. 그래서 신(身), 구(口), 의(意) 삼업이다. 예배(禮拜)란 부처님을 받들어 공경하고 아만심을 버리려는 하심(下心)의 표현이다. 두 손을 합장함은 지극한 마음을 모으는 것이요 이마를 땅에 대고 두 손을 뒤집어 올림은 아상의 상징인 내 자신의 이마보다 부처님의 두 발이 더욱 존귀함을 상징으로 표현하는 행위이다. 양 무릎과 양 팔꿈치,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림은 이제 나의 아만과 어리석은 알음알이를 다 버리고 부처님과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에 이 목숨을 다해 귀의하겠다는 약속인 것이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에 귀의함은 바로 참나(진여자성, 眞如自性)에 귀의함이다. 삼세제불의 본성인 참나(불성,佛性), 우주 삼라만상의 근본인 참나(법성, 法性)에 귀의함이다. 아상과 어리석음을 버림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현재 이전의 자신의 신, 구, 의 삼업으로 지은 욕망과 집착의 흔적인 허상임을 알아 구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참 나의 빛으로 비추어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욕망과 집착을 버리고 참 나의 성품으로 비추어 행한다면 언제 어디서나 항상 예배하는 것이 된다.

 

본문: 활용하면 나타나고 버리면 감추어지나니 겉의 예배를 통하여 안의 지혜가 밝아지는 일은 오직 성품과 형상이 서로 응해야 하느니라. 만일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 겉모습에 집착한다면 안으로는 미혹에 떨어지기 때문에 탐, 진, 치에 항상 악업을 짓고 겉으로는 모습만을 드러내어 거짓으로 예경한다 하니 어찌 참된 예배라 할 수 있겠는가? 성인에게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중생은 윤회에 떨어지는 일을 면치 못하느니라. 어찌 공덕을 이루리오. 아무런 소득이 없으니 어떻게 도를 구하리오.

 

해설: 수행자는 팔만사천의 위의(威儀)와 세행(細行)을 지켜야 한다. 위의와 세행의 목적은 여법한 수행자의 모습이다. 여법(如法)이란 참나인 진여 자성의 작용과 하나됨을 의미한다. 매순간 일체 모든 행위를 참나를 일깨우는 방법으로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이치를 모르거나 혹은 알면서도 겉모습에 집착하여 행위와 마음이 서로 호응하지 않는다면 행위로 인해 예배의 본래 목적인 지혜가 점점 밝아져 깨달음에 나갈 수 없다. 오히려 위선과 가식의 마음은 더욱 오염될 것이고 욕망과 집착이 증장될 것이며 나아가 탐, 진, 치 삼독이 가득찰 것이다. 이와 같은 행위를 어떻게 예배와 예경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불보살님 존상에 예배하여 욕망과 집착의 대상을 구하기를 발원하니 예경이 아니라 오히려 부처님을 욕되게 하고 비방하는 행위이다. 어떻게 도를 이루어 생사윤회고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 참으로 어리석은 모습이다. 행위와 마음이 일치하면 일거수일투족 일체 행위가 예경이며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제불보살의 모습이 될 것이다. 다르면 하루 종일 예경해도 순간순간 생사의 업을 지을 뿐이다.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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