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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이야기

[스크랩] 중도정견에 대하여

 

머리로 하는 수행은 ‘차별심’에 빠져

항상 가슴으로 종교심으로 수행하길

해석: 또 한 스님이 등장하는데 남양사람 신회다. 신회가 “대사님께서는 좌선하시면서 보십니까, 보지 않으십니까?”라고 묻자 신회를 세 차례 때리고 나서 신회에게 묻기를 “내가 그대를 때렸는데, 아프냐 아프지 않으냐?” 하였다. 이에 신회는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합니다” 하니 육조는 “나는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한다”고 대답했다. 이에 신회는 그 이유를 묻는다. 육조는 “내가 본다고 하는 것은 항상 나의 허물을 보는 것이니 그러므로 본다고 말하는 것이며, 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과 사람의 허물과 죄를 보지 않는 것이니, 그 까닭에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느니라”고 답한다. 그러면서 “앞에서 본다고 한 것과 보지 않는다고 한 것은 양변(兩邊)이요, 아프고 아프지 않음은 생멸(生滅)이니라. 그대는 자성(自性)을 보지도 못하면서 감히 와서 남을 희롱하려 하는가?”라고 말한다. 또 말씀하시기를 “그대 마음이 미혹하여 자성(自性)을 보지 못하면 선지식에게 물어서 길을 찾을지니, 마음을 깨달아서 스스로 자성을 보게 되면 법을 의지하여 수행하여라. 그대가 스스로 미혹하여 자기 마음을 보지 못하면서 도리어 혜능의 보고 보지 않음을 묻느냐? 내가 보는 것은 내 스스로 아는 것이라 그대의 미혹함을 대신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법문: 육조가 신회에게 한 법문 요지는 중도정견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육조가 신회에게 본 것이 무엇이냐 물으니 모든 제불의 불성이라고 답한다. 육조가 ‘내가 머리도 꼬리도 없고 형상도 이름도 없다’ 했는데 어찌 불성이라 하느냐고 되물으니 한 마디로 각색하자면 신회는 ‘스님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이런 의미의 답을 한 것이다. 육조가 그 자리에서 신회를 세 번 때리고는 아프냐고 묻는다. 아프다 하니 불성은 받아들이는 것이 없다면서 어찌 아프냐 하고 재차 묻는다. 신회가 그러자 “어찌 목석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한다. “육조가 그렇다 어찌 목석과 같겠는가” 하는데 이는 중도 정견이 서면 해도 한 바가 없고 들어도 들은 바가 없는 경지가 됨을 말하는 것이다. 

  
 

육조가 말하는 ‘내가 본다고 한 말은 나의 허물을 본 것이니’는 육조가 중생과 똑같이 업식에 휘둘리고 욕망에 휘둘려 사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나는 항상 내 허물을 본다는 말은 우리는 본래 성품을 깨달으면 그 깨달은 성품이 순리대로 흘러가게끔 그렇게 되어야함을 말하는 것이다. 염기즉각(念起卽覺), 한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을 바로 자각하라고 하는 것이다. 자각하는 것 자체가 진여불성 본성자리이다. 그러니 본성 자리 그대로 살아야하는 것이다. 정견이 안 서면 집착 애착으로 중생 업식을 붙들게 된다. 그것이 바로 허물이다. 육조는 그것을 항상 살핀다고 한 것이다.

‘하늘과 땅과 사람의 허물과 죄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라는 말은 정견이 서있지 않으면 항상 양변에서 옳고 그름 자기 이익에서 바라보는데 이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중생이 미혹 돼서 자기 스스로 고통 받고 얽매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연민히 여겨야 할 대상이니 그것으로 시비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본래 중도정견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것이다.

달마로부터 시작된 선법은 중도정견이다. 사람의 본래 본성 그대로를 보라는 것이 선법의 일관된 가르침이다. 육조단경 다음 장은 법통설, 마지막으로 남종돈교를 끊어지지 않도록 잘 전하라는 대목이 나온다. 마지막으로 강조하는 것은 머리로 중노릇 하지 말고 가슴으로 하라는 것이다. 가슴으로 들어가서 모든 법과 수행이 가슴에서 나와야 한다. 가슴은 발보리심이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발심, 가슴에서 나오는 불교를 해야한다.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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