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단 포괄하되 치우치지 않아
그 이면까지 보는 ‘희망의 길’
부처님은 “쾌락과 고행의 두 극단을 떠나지 못한 수행에는 진정한 깨달음의 결실이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출가 후 6년 동안 당시 전통에 따라 고행에 매진하던 부처님은, 육체를 괴롭히는 게 능사가 아니란 걸 깨우쳤다.
이후 보리수나무 그늘 아래서 몸을 쉬면서 선정(禪定)에 몰입한 끝에 비로소 무상정각(無上正覺)을 얻었다. 중도란 이것에도 저것에도 현혹되지 않는 길이며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과 거리를 두는 길이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중도는 중간을 넘어 세계의 실상(實相)을 따르는 길이다. 근현대 한국불교 최고의 선지식으로 일컬어지는 성철스님은 ‘백일법문’을 통해 불교 대중화의 서막을 열었다. 아울러 백일법문의 백미는 중도법문이다. 성철스님은 “중도는 중간이 아니다”라고 일갈했다.
“중도라는 것은 모순 대립된 양변인 생(生)과 멸(滅)이 서로 융화하여 생이 멸이고 멸이 생이 되어버리는 것을 말한다”며 물과 얼음의 비유를 들었다. 예컨대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됐다고 물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얾’이라는 인연에 따라 얼음으로 나타났을 뿐, 얼음이 물이고 물이 얼음이다. 끊임없이 생멸을 반복하기에 궁극적으로 불생불멸이며 삼라만상은 그 자체로 완전하다.
곧 중도란 사물의 이면을 볼 줄 아는 삶이며 균형을 유지할 줄 아는 삶이다. 교리에 근거하면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원리에 충실한 삶이다. 모든 것은 변화함을 알기에 주어진 현재에 최선을 다하고, 독립된 내가 없음을 알기에 ‘나’를 고집하지 않는다. 반쪽만 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제도와 관습으로 인해 세상은 시끄럽고 매몰차다.
반면 전체를 조망하는 이의 마음은 여유롭고 풍요롭다. 성철스님의 제자인 조계종 원로의원 고우스님은 중도를 통찰하면서 네 가지를 깨달았다고 털어놨다.
△타인과 나를 비교하지 않게 됐고 △내가 하는 일의 가치에 확신을 갖게 됐고 △자주적인 사람이 됐고 △소통하는 사람이 됐다는 것이다. 내가 있는 그대로 부처인 만큼 남도 부처라는 성찰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과 진정한 배려심이 생긴다.
중도는 희망의 길이기도 하다. 해인사승가대학장 원철스님의 베스트셀러 <집으로 가는 길은 어디서라도 멀지 않다>에는 중도의 관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겨울 준비로 김장을 했다. 배추걷이가 끝난 휑한 빈 산밭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한 해를 마무리한다. 배추로서는 아름다운 마무리겠지만, 김치로서는 새로운 시작이다.”
배추가 김치로서 새로운 삶을 이어가듯, 나무가 죽으면 흙으로 ‘소생’한다. 요컨대 중도법문은 길이 막혔다고 실망하지 말고 길이 훤하다고 자만하지 말아야 함을 가르친다. 언젠가는 막히고 기어이 뚫리는 법이니까. 다르게 보면 제대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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