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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법이야기

[스크랩] 이 글을 보는 그대도 허상이다

 

본문: 묻기를, 어찌하여 마음이 도(道)의 본체라고 하는 것입니까? 답하기를, 마음은 목석과 같으니라.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자신의 손으로 용과 호랑이를 그리고 나서 스스로 그 그림을 보고서 스스로 두려워하는 것과 같느니라.

미혹한 사람도 이와 같아서 심식의 붓으로 도산, 검수지옥을 그리고 도리어 심식으로 그것을 두려워하느니라. 만약 능히 두려움이 없으면 망상이 실답게 제거 되느니라. 또한 의식의 붓으로 분별하여 색, 성, 향, 미, 촉을 그리고서 도리어 스스로 보고는 탐, 진, 치를 일으켜 혹 취하기도 하고 혹 버리기도 하며 도리어 심식으로 분별하여 갖가지 업을 일으키느니라.

만약 심식이 본래부터 공적하여 처소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알면 이것이 바로 도를 닦는 것이다. 혹은 심식의 분별로 호랑이, 이리, 사자, 독룡, 악귀, 오도장군, 염라왕, 우두아바 등을 그리고 스스로 분별하여 얽매여서 갖가지 고뇌를 받느니라. 단지 이 마음을 가지고 분별한 것이 모두 다 대상이니라.

만일 마음이 본래 공적함을 깨달으면 이 마음은 색이 아님을 알게 된다. 즉 마음은 색에 속하지 않으며 마음은 물질이 아니니라. 스스로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니라. 단 실체가 아님을 알면 즉시 이것이 해탈이니라.

중생 부처, 윤회 해탈도 허상

참나는 제행무상이요 인과응보

해설: ‘참나’는 의식이 없는 목석과 유사하여 대상이나 분별에 물들지 않는다. 단지 대상이나 분별심을 비추어 알 뿐이다. 비유하면 화가가 자신이 호랑이, 사자, 용 등을 그려놓고 자신이 실체로 여겨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

현재 이전에 자신이 행한 업식이 참나에 비추어져 환영이 나타나면 그 업식의 환영이 실체라고 여겨 집착 분별하여 새로운 업식을 만들고 이것이 다시 참나에 비추어져서 나타나게 된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변해가니 제행무상이요 인과응보이다.

그러나 자세히 성찰해보면 현재이니 과거이니 하는 시간도, 과거에 행한 기억도, 지금의 분별 집착도, 미래의 변해갈 업식도, 환영이니 실체이니 하는 것도, 이 모두의 주체인 나라는 것도 이 모두가 참나에 비친 업식의 환영일 뿐이다. 모두가 꿈속의 일이다. 참나는 그저 텅 비어 업식을 비추어 나타나 알게 할 뿐이다. 실체하는 것은 오직 참나일뿐 참나에 비치어 아는 대상들은 모두가 환영일 뿐이다.

윤회와 해탈, 중생과 부처, 생사와 열반 모두가 꿈속의 일이다. 이러한 이치를 알고 실천해 나가는 것이 수행이요 더 이상 속지 않고 완전해짐이 해탈이요 열반이다.

◼ 달마사행론 - 20. 도심을 증장시키도록 인도하는 문

본문: 만일 지금 법에 의거하여 불, 법, 승의 도를 행할 시에는 선악, 호추, 인과, 시비, 지계, 파계 등의 견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 만일 사람이 이와 같은 계교를 내면 이것은 모두 미혹이며 자신의 마음의 사량 분별이 나타난 것이니라. 경계가 자신의 마음을 따라서 일어남을 알지 못한 것이니라.

만일 일체법이 실체로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알지라도 이것 역시 자기 마음의 사량 분별이 나타난 것이니 모두가 미혹된 마음으로 옳고 그름을 짓느니라. 만일 사람이 부처님의 지혜가 수승하다고 말하더라도 이것 역시 자기 마음의 사량분별이 나타난 것이니라. 자기의 마음이 지어 만드는 것이 있다거나 자기의 마음이 지어 만드는 것이 없다라는 것도 도리어 미혹에 떨어지는 것이니라.

해설: 바른 법에 의거하여 여법하게 수행하고자 한다면 선악, 호추, 인과, 시비, 지계, 파계, 정법, 비법 등의 분별심을 내지 말아야 한다. 올바른 수행이란 이 모든 분별의 주체인 참나(진여 자성)을 찾아 깨닫는 것이지 참나에 비친 대상을 분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견, 문, 각, 지 이 모두가 참나에 비친 환영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분별하는 대상, 분별심, 분별의 주체인 나, 지금 이 순간, 진리니 달마어록이니 부처이니 참나이니 등등 모두가 참나에 비친 업식의 허상일 뿐이다. 이 글을 보는 그대도 허상이다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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