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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이야기

[스크랩] 법보시와 재물보시

 

 

보시에는 법보시와 재물보시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지도론>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수행하는 사람은 ‘법보시는 이익이 훨씬 크니, 법을 보시하는 인연으로 모든 부처님 제자들이 도를 얻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부처님도 재물의 보시보다 법보시가 낫다는 말씀을 여러 번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보시에 어떤 차이가 있기 때문일까요? 대지도론 제22권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첫째, 재물을 보시하면 그 과보가 제한적입니다. 준 것만큼의 과보가 나타나지요. 하지만 법을 보시하면 그 과보가 끝없습니다.

둘째, 재물을 보시하는 일은 우리를 욕계 즉 욕망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 머물게 하는 과보만 나타나지만, 법을 보시하면 삼계에서 두루 그 과보를 받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삼계를 벗어나게 해줍니다. 삼계를 벗어난다는 말은 해탈한다는 뜻과 통합니다.

셋째, 법을 보시하려면 명예와 재물의 이익이나 세력을 구하는 마음에서 하면 안 됩니다. 오직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모든 생명체들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에서 구해주겠다는 넓고도 큰 자비심으로 하는 것이 법보시입니다. 하지만 법을 보시하면서 명예와 같은 것들의 과보를 바란다면 그건 시장에서 장사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넷째, 재물을 보시하면 내가 가진 재물은 줄어듭니다. 하지만 법을 보시하면 보시할수록 내게는 법이 더 늘어납니다. 즉 다른 이에게 바른 길을 일러주면 내 자신의 지혜를 더 키워준다는 말인데 <유마경>에 아주 좋은 예가 있습니다.

재물 보시는 윤회 속에 ‘늘 주고받던 일’

법ㆍ지혜는 보시할수록 더 늘어나고 빛나

마라의 궁전에서 쾌락(欲樂)에 젖어 살던 여인들에게 유마거사가 진정한 즐거움(法樂)을 이야기해줍니다. 그러자 마라의 하수인으로서 그때까지 쾌락에서 벗어나본 적 없던 여인들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뜹니다. 자신들이 얼마나 덧없고 먼지투성이인 즐거움에 젖어 살았는지를 알게 된 것이지요.

여인들은 진리의 즐거움을 알게 되자 마라의 궁전에 혐오심을 품습니다. 그런데 하필 이때 마라가 나타나서 여인들을 다시 거느리고 제 궁전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여인들에게 유마거사는 이렇게 위안을 줍니다.

“그대들은 마라의 궁전으로 가서 지금도 덧없는 쾌락에 젖어 사는 그곳 존재들에게 법의 즐거움을 일러주십시오. 당신들이 밝힌 하나의 등불은 저들 모두에게 옮겨져 그 마라의 궁전을 환히 비출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의 등불에서 백천 개의 등불로 불이 옮겨졌다고 해도 첫 번째 등불의 빛이 줄어드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저 궁전이 더할 나위 없이 환히 빛나게 됩니다.”

유마거사의 이 법문을 들은 마라의 여인들은 기꺼이 용기를 내어 마라의 궁전으로 되돌아갑니다. 법을 보시하면 자기 지혜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이 환히 빛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오히려 자신의 지혜가 더욱 크게 빛을 낸다는 것-바로 유마거사의 무진등(無盡燈)법문입니다. 법보시의 정신을 제대로 알려주는 법문이라 생각합니다.

다섯째, 재물을 보시하는 일은 낡고 오래된 법이요, 법을 보시하는 일은 새로운 법입니다. 다시 말하면, 재물의 보시는 한없는 윤회 속에서 늘 해오며 주고받던 일이요, 한량없이 주고받던 물건들이지만, 성스러운 법을 보시하는 일은 이제 막 시작하는 것이요, 아직 얻지 못한 것이므로 새로운 법인 것입니다.

여섯째, 재물을 보시하면 배고프고 목마르고 춥고 더운 괴로움만을 없애줄 뿐입니다. 하지만 법을 보시하면 온갖 번뇌의 병을 모조리 없앨 수 있습니다. 다시는 병을 앓지 않게 됩니다.

이런 까닭에 수행하는 사람은 법보시를 간절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대지도론에서는 말합니다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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