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이 말씀을 요약하면 마음에 즉하여 마음이 없는 것이 마음의 도를 통달했다 이름 하느니라. 묻기를, 어떤 것이 일체법을 통달한 것이라고 합니까? 답하기를 사물에 즉해서 견해를 일으키지 않고 이름과 사물에 견해를 일으키지 않는 것을 통달이라 이름 하느니라. 사물에 즉해서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사물에 즉하여 탐욕을 일으키지 아니하며 사물에 즉하여 번다함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통달함을 갖추었다 이름 하느니라.
물질에 즉해서도 물질이 없음이 색에 대한 바른 통달이라 하며 유에 즉해서 유가 아님이 유의 통달이라고 이름하며 생에 즉해서도 생이 없음이 생에 통달이라 이름하며 법에 즉해서 법이 없음이 법의 통달이라 이름 하느니라. 사물에 대하여 곧 바로 통달하면 이 사람은 혜안이 열린 것이니라. 또한 사물을 접하여도 다름을 보지 않나니 즉하여 다름이 없으면 다름에 대하여 통달했다 이름 하느니라.
해설: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아상을 바탕으로 하는 분별심과 아상과 분별심 모두를 비추어 아는 근본심이다. 이 분별심을 번뇌망상이라고 하고 근본심을 ‘참나’라고 한다. 마음의 도를 통달했다함은 분별망상이 본래 허상임을 알아 집착하지도 없애려고 하지도 않는 것이다. 분별의 주체인 나 객체인 대상 분별의 느낌 모두가 참나에 비친 환영이니 구할 것도 버릴 것도 없는 것이다.
일체법에 통달했다는 것은 우리가 보고 듣고 알고 느끼는 일체 모든 것이 참나에 비친 업식의 환영임을 알아 집착하지도 버리려하지도 않는 것이다. 본래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어리석은 집착으로 존재한다고 여겨 구하려 집착하니 생사윤회를 지어가는 것이다. 생사윤회고를 벗어나려고 욕망과 집착을 버리라고 하나 참나의 성품을 알고 나면 구할 필요도 버릴 필요도 없는 것이다.
■ 달마사행론 - 26. 정사는 하나의 모습이요 한 몸임
본문: 묻기를, 경전에 말씀하시되 외도는 모든 견해를 즐겨하고 보살은 모든 견해에 움직이지 않는다. 천마는 생사를 즐겨하고 보살은 생사를 버리지 않느니라 하셨나이다. 답하기를, 사견은 정견과 같으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니라. 외도가 모든 견해를 좋아하는 것은 소위 있다는 견해와 없다라는 견해이니라. 유(有)에 즉하여 유가 아니며 무(無)에 즉하여 무가 아닌 것을 부동이라고 하느니라.
부동이라 함은 정도 버리지 않고 사도 버리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정이니라. 이해했을 때에는 정사가 없으니 모름지기 사를 버리고 정을 구하지 않느니라. 유에 즉하여 유가 아님은 유라는 견해에 부동함이요 무에 즉하여 무가 아님은 무라는 견해에 부동함이니라. 법에 의거해 보면 정사가 사와 정은 도무지 다르지 않는 고로 부동이라 말하느니라.
또한 모름지기 사를 버리고 정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 고로 저 모든 견해에 부동이라고 말하느니라. 경(經)에 이르시길 ‘삿된 상으로써 정법에 들어가느니’라고 하셨느니라. 또 이르시길 ‘팔사를 버리지 않고 팔해탈에 들어간다’ 하셨느니라.
해설: 외도는 아(我)가 소멸한다는 무의 단견과 항상 존재한다는 유의 상견에 집착하여 분별하고 천마는 선과 악, 정과 사를 분별하여 집착하니 생사를 지어나간다. 그러나 보살은 견문각지 일체 모든 것이 실체하지 않는 허상이요 나라는 것(아트만) 역시 허상임을 알아 유와 무, 선과 악, 정과 사 모두를 내려놓는다.
일체처 일체시에 참나로 비추어 유도 허상이요 무 또한 허상임을 알고 정도 허상이요 사 또한 허상임을 알아 집착하지도 버리지도 않으니 마음이 항시 부동이요 정등이요 정각이다. 또한 진여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생사를 짓지도 열반을 구하지도 않으니 이것이 바른 정법이요 바른 해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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