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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법이야기

[스크랩] 중도 정견과 선

 

‘있다-없다’ 양변 집착 버리면

어디에도 매임 없이 자유로워

부처님은 쾌락과 고행의 양변을 버리고 중도를 깨달아 영원한 자유와 행복에 이르렀다. 누구나 중도를 공부해서 깨치면 영원한 행복을 성취할 수 있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교다. 그러므로, 불교는 중도를 핵심으로 한다. 팔만대장경이나 모든 불교 사상은 중도의 다른 표현이다.

중도 하나만 정확히 알면 모든 것이 회통된다. 우주만물은 모두 중도로 존재하는 까닭에 중도를 깨치면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하거나 자유자재하다. 그런데, 이 중도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평생 불교 공부한 사람도 중도를 알고 생을 마감하는 분이 드물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부처님께서는 초전법륜에서 당신이 깨친 중도를 이렇게 설명한다.

“어떤 것을 중도라 하는가? 곧 팔정도이다. 정견(正見),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전법륜경>) 이로 알 수 있는 것이 중도는 곧 팔정도이다.

팔정도, 여덟 가지 바른 길이라 하니 아주 복잡하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고 단순하다. 팔정도는 가장 앞에 있는 정견(正見), 이것 하나만 알면 나머지 일곱 가지가 저절로 되는 것이다. 정견만 알면 중도를 아는 것이요, 팔정도도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견(正見)이란 무엇인가? 부처님께서 정견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한 기록이 <가전연경>이다. 가전연은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논의제일 존자인데, 부처님께 물었다. “무엇을 정견이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세간에는 두 가지 의지함이 있으니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이다. … 취하여 집착하기 때문에 있다는 것에 의지하고 혹은 없다는 것에 의지한다. 만일 취함이 없으면 마음이 경계에 매여도 취하지 않고 머물지 않고 헤아리지 않아서, 나의 괴로움이 생할 때는 생하고 괴로움이 멸할 때는 멸하여, 저것에 의심하거나 미혹하지 않으며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아니, 이것을 정견이라 이름 한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정견이다. 세상에 모든 문제는 ‘있다’와 ‘없다’ 두 견해에 의지한다. 돈이 있다-없다, 직장이 있다-없다. 권력이 있다-없다 등등 이것은 모두 대립하는 양 극단에 치우친 견해, 변견(邊見)이다. 이 양변에 집착하여 분별심을 일으키면 있는 사람은 우월의식으로 갑이 되어 없는 을을 천대하고 괄시한다.

또 없는 사람은 없다는 열등의식으로 있는 사람 앞에 위축되고 부러워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양변에 집착하여 분별심에 끄달리며 살아가니 행복할 수가 없다. 있는 사람도 영원히 가진 것이 아니요, 없는 사람도 영원히 없는 것이 아니니 ‘있다-없다’의 양변에 집착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보고 당당하게 살아갈 때 자유와 행복이 온다. 이것을 정견이라 한다.

이 정견으로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면, ‘나의 괴로움이 일어나고 사라질 때 집착하거나 머무르지 않고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볼 수가 있다. 이것을 <금강경>에서는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이 난다(應無所住 而生其心)’라고 표현했다. 바로 쌍차쌍조한 중도의 마음이다. 그러니 정견은 바로 중도의 마음으로 나와 세상 보는 것을 말한다.

불교는 이와 같이 중도 정견을 기본으로 해야 한다. 정견이 서야 불교와 세상을 바른 안목으로 보아 지혜롭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 우리 종단도 이제는 사부대중 교육과 수행의 패러다임을 중도 정견의 확립과 실천으로 업그레이드하면 좋겠다. 참선도 중도 정견 없이 하면 나침반 없이 망망대해를 건너려는 것과 같다.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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