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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법이야기

[스크랩] 보살은 장애가 없다

 

 

본문: 묻기를, 어떤 것이 보살의 행입니까? 답하기를, 현성의 행도 아니며 범부의 행도 아닌 것이 보살의 행이니라. 만약 보살이 배울 때에는 세간의 법을 취하지 않으며 세간의 법을 버리지도 않느니라. 만약 보살이 심식에 즉하여 능히 도에 들어가면 범부와 성문이 측량할 수 없느니라.

소위 일체의 사처와 일체의 색처와 일체의 악업처를 보살은 사용하여 모두 불사를 지으며 모두 열반을 지어가니 이 모두가 바로 대도이니라. 즉 이러한 일체처는 처소와 처소 아닌 것이 없느니라. 즉 이것이 법처요 이것이 도처이니라. 보살은 일체처를 버리지도 아니하고 취하지도 아니하느니라. 보살은 일체처를 가리지도 않고 모두 능히 불사를 지으며 생사에 즉하여 불사를 지으며 미혹에 즉하여 불심을 지어가느니라.

해설: 보살은 견문각지, 일체 모든 것이 실체하지 않는 환영임을 알아 취하려하지도 버리려하지도 않는다. 범부는 환영을 실체로 여겨 집착하여 구하고 성문, 연각은 구하려는 그 마음이 고통의 근원임을 알아 집착을 버리고 생사를 벗어나 열반을 구한다. 그러나 생사윤회도 열반도 또한 환영임을 알지 못한다. 보살은 모든 것이 허상임을 알아 집착하지 않으며 일체처일체시 모든 것이 참나의 작용임을 안다.

■ 달마사행론 - 31. 정견과 사견은 본체가 다름

본문: 묻기를, 모든 법은 무법이거늘 어떻게 불사를 짓습니까? 답하기를, 짓는 것, 짓지 않는 것이 지음이 없는 법이요, 좋은 것과 좋지 않는 것에서 부처를 보느니라. 묻기를, 어떻게 해야 부처를 봅니까? 답하기를, 탐욕에 즉하여 탐욕의 상을 보지 않는 것이 탐욕을 보는 법이니라.

괴로움에 즉하여 괴로움의 상을 보지 않는 것이 괴로움을 보는 법이니라. 꿈에 즉하여 꿈의 상을 보지 않는 것이 꿈을 보는 법이니라. 이것을 이름 하여 일체처에서 부처를 보는 것이니라. 만약 상을 볼 때에는 이것이 바로 일체처에서 귀신을 보는 것이니라.

해설: 제법이 모두가 허상이요 공이거늘 어떻게 불사를 지어 가는가? 불사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며 모든 불사의 긍정적 목적은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즉,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이 모두가 참나에 비친 환영임을 알아 일체의 모든 것에서 부처인 참나를 보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부처인 참나를 깨달을 수 있을까? 탐욕이 일어날 때 탐욕의 대상이나 마음의 욕망에 빠지지 말고 탐욕의 근원인 주인공을 보며 괴로움, 즐거움, 슬픔, 기쁨, 등등의 경계에 직면할 때 경계의 대상이나 번뇌망상에 빠지지 말고 그 주체인 참나를 찾아가는 것이다.

■ 달마사행론 - 32. 법계보리 차별 문

본문: 묻기를, 법계의 체성은 어느 곳에 있습니까? 답하기를, 일체의 처소가 모두 다 법계의 처소이니라. 묻기를, 법계의 체성 중에 계를 지키는 것과 파하는 것이 있습니까? 답하기를, 법계의 체성 중에는 범부와 성인 천당과 지옥도 없으며 또한 시비와 고락 등도 없어서 항상 허공과 같느니라.

묻기를, 어느 곳이 보리의 처소입니까? 답하기를, 행하는 곳이 보리의 처소이며 법을 보는 처소가 보리의 처소이며 앉은 곳이 보리의 처소이니라. 법을 보는 곳과 서 있는 곳이 보리의 처소이며 발을 들고 내리는 일체가 모두 다 보리의 처소이니라.

해설: 법계의 체성이란 법성을 말하며 법성은 곧 진여 자성이요 참나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우주 삼라만상은 모두가 참나에 비친 업식의 환영이기 때문이다. 참나를 벗어나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없다. 있다 없다 벗어났다도 역시 참나에 비친 모습일 뿐이다.

지계와 파계 선과 악 범부와 성인 지옥과 천당 등등은 모두가 참나의 거울에 비친 모습이다. 또한 보리란 깨달음의 지혜를 말하며 시방법계 일체 모든 것이 참나에 비친 허상임을 비추어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의 지혜는 시방법계 일체처 일체시에 항상 가득하다. 행주좌와 어묵동정 모두가 보리의 모습이다.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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