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이 깨칠 때 그 자세 ‘중도’
바깥 경계에 생각이 머물지 않고
안으로도 마음이 평안하면 ‘좌선’
참선하면, 좌선이 떠오른다. 고요한 산사나 선방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면벽하는 모습이 참선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기록으로 보면 부처님도 6년 동안 모진 고행을 다해봤으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고행을 포기하고 기력을 회복한 뒤 보리수 아래에 고요히 앉아 명상으로 완전한 열반, 영원한 자유의 길에 이르렀다. 부처님이 깨칠 때 자세가 바로 지금 우리가 하는 가부좌하고 선정에 드는 좌선의 모습이다.
그런데 부처님이나 선종을 정립한 육조 스님이 말씀하신 것은 그런 모양의 좌선이 아니다. 좌선을 분명히 알아야 바르게 잘 할 수 있다. 먼저, 선종에 큰 영향을 준 <유마경>에 유명한 일화가 있다. 부처님 당시 깨달음을 인가받은 재가 제자로 유마거사가 있었다. 그는 사리불이 숲속에서 좌선을 하고 있자, 찾아가 이렇게 말한다.
“사리불이시여, 앉아 있는다고 해서 좌선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좌선이란 생사가 겹쳐진 삼계(三界)에 있으면서도 몸과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것을 좌선이라고 합니다. 마음과 그 마음의 작용을 없앤 무심한 경지의 선정(滅定)에서 나오지 아니하고서도 온갖 위의(威儀)를 나타내는 것, 이것이 좌선입니다. 진리의 법을 버리지 않고서도 범부의 일을 나타내는 것이 좌선이며, 마음이 안으로 응집된 고요한 상태에도 탐닉하지 않고 밖을 향하여 혼란되지 않는 것 … … 번뇌를 끊지 않고서 열반에 드는 것을 좌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와 같이 좌선하는 사람이라면 부처님께서 인가하실 것입니다.”(유마경)
비록 유마거사의 말씀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좌선의 의미다. 가부좌로 앉아 있는다고 다 좌선이 아니다. 앉아있든, 누워있든, 걸어가든, 물구나무 서있든지 마음이 중도가 되어야 좌선이다.
마음이 중도가 된다함은 안과 밖, 선과 악, 옳고 그름과 같은 양변에 생각이 머물거나 그 가운데도 머물지 않는 마음, 즉 <금강경>의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이 나는” 것을 말한다.
선종을 정립한 육조 스님도 마찬가지다. <육조단경> ‘좌선’ 편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무엇을 좌선(坐禪)이라 하는가? 일체 걸림이 없어 밖으로 모든 경계 위에 생각이 일어나지 않음을 좌(坐)라 하고, 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 어지럽지 않음이 선(禪)이다.”
육조 스님이 말하는 좌선은 바깥 경계에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면서 안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앉아서 참선하는 좌선과는 다르다. 앉아서 참선한다고 좌선이 아니다. 앉아 있어도 경계에 끄달리면 좌선이 아닌 것이다. 반대로 걸어가면서 설거지하면서 빨래하면서도 바깥 경계에 생각이 머물지 않고 안으로도 마음이 평안하면 좌선하는 것이다. 그러니 분주한 시장 한 가운데에서도 좌선할 수도 있고, 선방에 앉아 있더라도 마음이 바깥 경계에 머물러 망념이 오락가락하면 좌선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좌선의 의미를 바로 알게 되면, 유마거사가 좌선하던 사리불에게 왜 뭐라 했는지, 무식한 나뭇꾼 오랑캐 행자가 경전을 보지도 좌선도 않고 방앗간에서 여덟 달 동안 일만 하다가 어떻게 깨쳤는지를 알 수가 있다. 또한, 남악스님이 마조스님에게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며 좌선해서 어떻게 부처가 되느냐 힐난하며, 수레가 안가면 수레를 쳐야 하느냐, 소를 때려야 하느냐 물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앉는 자세나 오래 앉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마음이 중도 일념(一念)이 되면, 생활에서도 얼마든지 참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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