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 비워(定) 나오는 바른 견해(慧)
우리도 본래 부처님처럼 갖추고 있어
실천만 하면 ‘영원한 자유’ 이를 것…”
우리 마음이 정혜(定慧)로 이루어져 있다. 정혜가 불교의 근본이고, 육조 스님의 법문도 마음이 정혜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혜를 정과 혜 둘로 보고 수행하는 분들이 지금도 있지만, 육조 스님 당시에도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육조 스님은 이렇게 거듭 강조한다.
“미혹하여 혜(慧)와 정(定)이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정과 혜는 몸이 하나여서 둘이 아니다. … 도를 배우는 사람은 짐짓 정을 먼저 하여 혜를 낸다거나 혜를 먼저하여 정을 낸다고 해서 정과 혜가 각각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이런 소견을 내는 이는 법에 두 모양이 있는 것이다(육조단경).”
정혜는 불이(不二)인데, 이것을 둘로 본다함은 정과 혜를 다르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에 번뇌를 비우면 정(定), 즉 지(止), 살(殺), 쌍차(遮), 사마타 등으로 표현하고, 그 자리에서 나오는 바른 견해가 혜(慧), 즉 관(觀), 활(活), 쌍조(雙照), 위빠사나라 한다. 이름만 다르지 내용은 하나다. 그래서 일체의 번뇌망념을 완전히 여읜 마음을 정혜, 지관, 살활, 쌍차쌍조, 사마타위빠사나라 한다.
우리 마음이 본래 정혜로 되어 있으나, ‘내가 있다’는 착각에 빠져 나-너, 선-악, 시-비의 양변에 집착하여 욕심과 화, 어리석음이 일어나면 분별망념이 정혜를 가리게 된다. 마치 태양이 본래 빛나고 있으나 먹구름이 가로막아 어두워지는 것처럼 본래는 밝은 거울이나 먼지와 때가 끼어 밝게 비추지 못하는 것과 같다. 즉, 우리 마음도 부처님처럼 본래 정혜로 밝은 지혜와 자비가 빛나나, 분별망념에 가려져 중생이라 착각에 빠져 생로병사를 괴롭게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분별망념의 먹구름, 거울에 끼인 때와 먼지를 완전히 닦아 깨쳐야 한다. 이 비우고 깨달아가는 과정이 수행이다. 이 수행에서도 정혜를 근본으로 보고 정진해야 하는데, 정과 혜로 나눠 둘로 보고 수행하면 법(法)에 두 가지 모양이 있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정(定, 사마타)을 닦아 혜(慧, 위빠사나)에 이른다거나 혜를 닦아 정에 이르러야 한다는 견해, 정과 혜를 따로 닦아야 한다는 견해, 선정과 지혜가 다르니 ‘정을 닦아 자비심을 키우고, 혜를 닦아 지혜가 나오게 해야 한다’는 말도 틀리다. 육조 스님은 이런 견해는 “입으로는 착함을 말하면서 마음이 착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경책한다. 수행하여 깨침은 입으로 다투는 데 있지 않다.
우리가 불교 공부를 하거나 선을 하는 데에서도 시비 갈등이 적지 않다. 우리는 깨달음을 통해 생로병사를 해탈하여 영원한 행복을 성취하는 것이 목적이지 시비분별은 옳지 않다. ‘나’라는 존재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중도이고, 연기 무아이니 나와 나의 것에 집착하는 것은 삿된 소견이다. 육조스님은 이런 입장에서 다툼을 경책하며, 이렇게 말한다. “만약 앞뒤를 다투면 이는 곧 미혹한 사람으로 이기고 지는 것을 끊지 못함이니, 도리어 법(法)의 아집이 생겨 사상(四相)을 버리지 못함이니라.”
우리 마음이 정혜고, 부처님이 이것을 깨쳤다는 것을 알았다면, 실천해야 한다. 입으로는 정혜를 말하면서 마음은 불법에 집착하고 있으면 정혜도 아니고 불법도 아니다. 우리가 지혜롭게 평화롭게 살려면 정혜를 알아 실천해야 한다. 정혜가 100% 되는 분이 부처님이고 도인이다. 아직 그렇게까지는 못하더라도 늘 마음에 욕망과 화와 어리석음을 비워 지혜와 평화를 생활해 나가면서 언행일치를 지향한다면 못할 것도 없다. 오직 이 길이 영원한 자유에 이르는 길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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