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 중생 제도해 완전한 열반으로
이끄는, 관념 벗어난 마음이 곧 대승
대승이라는 말은 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말이다. 범어 마하야나(mahayana)를 번역한 이 말은 대승불교가 일어나고부터 널리 퍼진 말이지만 초기불교에서도 대승이란 말이 쓰인 경우가 있다. <장아함경> <잡아함경> 그리고 <본생경> 등에도 대승이라는 말이 발견된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 쓰인 대승이라는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위대하다는 뜻에서 쓰인 존칭의 말이었다 한다. 따라서 대승은 대승불교가 시작되면서 보편적으로 널리 쓰인 말이 되었다. 물론 대승의 의미를 담고 있는 ‘보살’이라는 말과 ‘육바라밀’이라는 말이 <증일아함경> 등에 일부 등장하고 있지만 학자들은 이러한 말이 후대에 와서 증보된 내용으로 추증하고 있다.
대승은 기존의 부파불교의 교설과는 다른 차원에서 설해진 것으로, 부파불교의 한계를 벗어나 새로운 고차원적인 교법임을 천명하기 위해 내세운 우등(優等)한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대승불교가 일어나고부터 대승 이전의 것을 소승(小乘)이라 하여 일반적으로 대승과 소승을 상대적인 개념으로 이해해 왔다. 승(乘)은 수레나 배 등의 탈 것을 말하는 것이니 대승은 많은 사람을 태워준다는 말이고, 반대로 소승은 한 두 사람의 적은 인원을 태워준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크고 작은 차이를 두고 대.소승을 구분한다 말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대승이 일어난 시기를 마명(馬鳴)과 용수(龍樹)의 생존 시기를 전후한 1~2세기 경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마명과 용수는 대승불교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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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의 교법상 특징은 ‘법공사상(法空思想)’을 천명한 것이며, 또한 이타주의 수행관을 설한 ‘보살도 정신(菩薩道精神)’, 그리고 수많은 불보살이 등장하는 ‘다불신앙(多佛信仰)’으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대승의 이상적인 수행자상은 보살이다. 이 보살은 이승(二乘)에 비해 많이 뛰어남으로 대승이 된다 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대승정신을 소유한 자가 보살이라는 것이다.
<법화경> ‘비유품’에서는 대승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만약 어떤 중생이 부처님 법을 듣고 믿으며, 부지런히 정진하여 일체지(一切智)와 불지(佛智)와 자연지(自然智)와 스승 없이 스스로 깨닫는 지혜와(無師智) 두려움이 없음(無畏)을 구하고 한량없는 중생을 가엾이 여기어 안락을 누리게 하며, 천신과 인간들을 이롭게 하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면 이를 대승이라 이름한다.”
또 <금강경> ‘대승정종분’에서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모든 보살 마하살은 다음과 같이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알에서 태어난 것, 태에서 태어난 것, 습기에서 태어난 것, 변화하여 태어난 것, 형상이 있는 것, 형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 생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일체 아홉 종류의 중생에 대해 내가 모두 완전한 열반에 들게 하리라.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중생을 열반에 들게 하였어도 실제로 열반에 든 중생이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보살이 자아에 대한 고집 인간에 대한 고집, 중생에 대한 고집, 수명에 대한 관념적 고집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대목을 <금강경찬요>를 지은 규봉스님은 네 가지 마음으로 풀이했다. 일체중생 모두에 대하여 제도하고자 원력을 가진 마음을 광대심, 완전한 열반에 들게 해 주려는 마음을 일등이 되는 제일심, 중생을 제도하여도 제도했다는 생각이 없는 변하지 않는 항상 그대로의 마음을 것을 항심, 일체 관념적 고집이 없는 곡 상(相)이 없는 것을 부전도심이라 하여 이 네 가지 마음이 갖춰진 상태가 대승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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