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생멸원리로 반야삼매 禪 ‘자재’
중도정견 알면서 평상심 접해야 ‘자유’
<단경>에서는 최상승을 반야바라밀이라고 말한다. 반야바라밀은 중도정견으로서 연기진리 그 자체를 바로 볼 수 있고, 청산을 보면 눈에 청산뿐인 것을 마하라고도 한다.
찻잔을 이루는 것도 연생연멸 인연에 의해 생하고 멸하는 것이다. 형상을 갖춘 것이나 형상이 없는 심법(心法)이나 모든 것의 본질은 연기중도로서 생(生)하고 멸(滅)하므로 생(生)하여도 생(生)한 것이 아니고 멸(滅)하여도 멸(滅)한 것이 아니므로 무생(無生)이라고 한다. 컵이 인연이 다하면 컵도 없어지고 컵이라는 이름도 함께 공(空)한다.
<금강경>에서 “여래가 여래가 아니기 때문에 여래이다”라고 한 말은 <반야심경>에서 색(色) 그대로 공(空)을 보고, 공(空) 그대로 색(色)을 보는 중도정견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교학(敎學)에서는 공적영지(空寂靈知)라고 한다. 선종(禪宗)에서는 적적성성 성성적적(寂寂惺惺 惺惺寂寂)이라고 하며, 단경에서는 정혜일체(定慧一體) 또는 무념(無念)이라고 했다.
열반을 이루었다는 말은 역으로 열반에 머물지 않는다는 말이다. 만약 어떤 경지에 이르더라도 그 경지에 머무르면 마음에 병(病)이 된다. 선가(禪家)에 조주선사는 “부처 있는 곳에도 머물지 말고 부처 없는 곳은 급히 지나가라”고 했다. 머물고 집착하면 ?고 악취가 생긴다. 그리고 법이란 본래 머물 수 없는 것이다. 머물려고 조작하면 그 순간 스스로 자신에게 고통과 함께 윤회를 만드는 것이다.
법(法)은 항상 머물지 않고 흘러가는 것이다. 흐르면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게 된다. 내가 마음 쓰는 용심(用心)이 이와 같이 바뀔 때 세상이 부처의 세계로 바뀐다.
이와 같은 중도정견을 알지 못하면 이기심과 분별심으로 집착이 생기면서 업(業)이 형성되고, 업(業)은 윤회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본성은 업(業)이 없고 윤회도 없는 무생법(無生法)인 것을 믿어야 한다.
무생법을 선가(禪家)에서는 무심(無心) 또는 평상심(平常心)이라고 한다. 반야바라밀은 본래 중생세계가 없음을 알고 부처의 세계에서 무심과 평상심의 입장에서 생활하는 것을 <단경>에서는 반야바라밀이라 했다. 이러한 중도정견을 알면 무심한 바탕에서 평상심을 접하는 것이 너무나도 자유로우며 일상생활에서 모든 인간관계가 친화적이면서 수용력이 넓어지고 또한 함께 동사섭(同事攝)을 하고자 하는 포용력도 적극성으로 바뀐다.
무심과 평상심에서 쓰는 작용(作用)과 비작용(非作用)의 무생심(無生心)을 알면, 마치 새가 허공을 날아가도 흔적을 남기지 않듯이 마음이 생(生)하고 멸(滅)하는 원리를 지혜로서 관하여 반야삼매의 선(禪)생활을 자재롭게 잘 살 수 있다고 법문 해놓은 것이 <육조단경>의 제목에서 보는 선(禪)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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