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나 또한 나에 비친 환영
전하거나 받을 수 없어
참나 깨닫는 방법 전할 뿐
본문
“앞 서 깨달으신 부처님과 후에 깨달으신 부처님이 다음으로 마음을 전할 뿐 문자에 의존하지 않았는니라.”
해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마음(참 나)의 거울에 비친 정보이다. 정보가 아무리 많아도 어떤 정보이든 참 나의 거울에 비쳐지는 순간 생각이 떠오르고 알게 되고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포털 사이트에 아무리 정보가 많지만 클릭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이 모든 것의 근원이 바로 참 나(자성, 마음)임을 아는 것을 깨달음이라 하고 부처라고 한다.
부처님이 전한 진리란 바로 그 참 나를 말한다. 참 나는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 표현은 또 다른 대상이며 정보이다. 그 정보를 비추는 주체인 자성(참 나)는 아닌 것이다.
마음이니 자성이니 참 나이니 부처니 이 모두가 또 다른 망상의 모습이다.
그러나 참 나를 깨달은 선지식은 온 우주가 참 나이다. 티끌 하나, 풀포기 하나, 산하대지 두두물물이 온갖 언어와 소리, 몸짓 모두가 참 나의 표현이다. 하지만 이 모든 모습이 중생의 눈에는 또 다른 환영의 그림자들이다.
문자와 언어는 실제를 전달하는 상징기호, 즉 정보이다. 언어도단(言語道斷), 심행처멸(心行處滅)이란 말이 있다. 언어로써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마음과 행위가 사라진 곳이라는 것이다. 여기서의 마음은 참 나에 비춰진 정보와 참 나가 한 덩어리로 여겨 나와 동일시했을 때의 마음을 말한다. 행위는 마음의 강한 표현이다.
본문을 보자. “앞 서 깨달으신 부처님과 후에 깨달으신 부처님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할 뿐 문자에 의존하지 않느니라.” 문자로 표현할 수 없다. 문자뿐 아니라 그 무엇으로도 참 나는 나타낼 수 없다. 모든 것을 나타내는 근본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참 나만이 참 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앞서 깨달으신 부처님이니 후에 깨달으신 부처님이니 하는 모든 것도 또한 참 나에 비친 환영일 뿐이다. 또한 참 나는 전해주거나 받을 수 없다. 전하거나 받을 수 있다면 이미 참 나(자성, 불성)가 아닌 참 나에 비춰진 망상(정보, 업식)일 뿐이다. 다만 언어라는 방편으로 참 나를 깨닫는 방법을 전할 뿐이다. 지도요, 네비게이션이다.
역대 전등조사들께서 전한 것은 깨달음이나 진리를 전한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이루었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지금 말하는 모든 것이 군더더기요 알음알이다.
그러나 처음 가는 낯선 길에는 좀 더 상세한 지도나 네비게이션이 필요하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면 나침반이나 이정표만으로도 충분하다.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명마는 채찍의 그림자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어리석고 고집 센 당나귀는 채찍과 당근과 고삐가 필요한 법이다.
본문
어떤 사람이 질문했다. “문자를 의지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마음을 삼습니까”
달마스님이 대답하셨다. “그대가 나에게 질문하는 것이 그대의 마음이며 내가 그대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곧 나의 마음이니라.”
해설
언어를 빌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마음을 표현 전달하며 또한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지금 질문하고 답하는 이것이 마음의 표현이며 전달이며 마음이다.
마음이 없다면 무엇이 질문하고 답하고 이해하겠는가. 삼라만상이 참 나에 비친 허상(업식)이지만 그 허상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 또한 참 나이다.
중생들은 허상을 실체로 여겨 집착하지만 부처님 참 나에 비친 그림자임을 알아 집착하지 않는다.
중생은 행하는 모든 것이 번뇌 망상(업식)의 환영이지만 깨달은 자는 행주좌와 어묵동정, 산하대지가 모두 참 나의 실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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