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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법이야기

[스크랩] 원력과 보살행위 만이 생사의 바다를 건너다

티끌만한 집착도 결국 지옥으로

지금 이순간 나에 의해 지옥문이…

 

“스스로 돌아가 의지함(自歸依)이란 착하지 못한 행동을 없애는 것이며, 이것을 이름하여 귀의(歸依)함이라고 하느니라.”

귀의한다는 것은 오로지 원력만이 모든 것을 편안하게 해주기 때문에 공공적적 자리는 원력도 거기는 심을 수 없고 정견이니 종지니 선이니 악이니 그 자리는 그런 자체가 설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그러나 거기에다가 대자대비하신 부처님께서는 종지와 정견의 기풍을 원력과 보살행으로 대체 시켜주셨다. 왜? 말세 중생인 우리를 위해서. 그래서 생사의 바다를 건너가거라 그런 의미에서다.

“무엇을 천백억화신불이라고 하는가? 헤아리지 않으면 자성(自性)은 바로 비어 있어 고요하지만 생각하고 헤아리면 곧바로 스스로 변화하나니, 악한 것을 생각하면 변화하여 지옥이 되고 착한 법을 생각하면 변화하여 천당이 되고 독과 해침은 변화하여 축생이 되고 자비는 변화하여 보살이 되며, 지혜는 변화하여 윗 세계가 되고 우치함은 변화하여 아랫 나라가 되어 자성(自性)의 변화가 매우 많거늘, 미혹한 사람은 스스로 알아보지를 못하느니라. 한 생각이 착하면 바로 지혜가 생기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자성화신불이라 하느리라.”

자성화신불(自性化身佛)이 무엇인가? 종지와 정견과 보살의 원력이 충만돼 있는 사람에게는 공공적적한 이 자리가 습에 의해 가지고 있는 괴로움이나 탐착이나 애착이나 이기심 등 집착이 티끌만큼이라도 있으면 이에 의지하고 집착해서 그것이 종자가 되어서 결국에는 지옥으로 간다. 재질에 따라서 거친 번뇌도 있고 맑은 번뇌도 있는데, 맑은 번뇌는 아주 맑아 보이지만 그 티끌 만큼이 결국 종자가 돼서 지옥으로 간다. 그래서 지옥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이 순간에 지옥이 벌어진다. 내가 축생의 경계를 일으키면 그 자리에서 내가 축생의 몸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축생의 습성이 무엇인가. 탐착이다. 이것을 자유자재로 하는 사람을 화신불이라고 한다. 그러면 이 화신불은 무슨 능력이 있느냐 하면 무심의 자리를 확실히 본 사람이다. 무심의 자리를 본 사람이 평상심으로 나왔을 때, 평상심에는 팔만사천 경계가 생활 속에서 부딪히는데 그 경계를 잡아 쓴다는 것이다. 그 경계에 당하는 것이 아니고. 그 경계와 하나가 돼 즐기면 스트레스가 되고 화가 되는데 이런 것을 당한다고 한다.

화신불은 당하는 것이 아니고 그 경계가 연생연멸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면 그게 그 자리에서 공관된 자리에서 산은 산이고 승은 승이고 속은 속이고 이렇게 정확하게 관자재하는 것을 화신불이라고 한다. 그 내용이 천백억가지라 하는데 이는 가장 많은 수를 상징해서 일컫는 것이고 무수히 많다는 뜻이다.

승은 무엇인가. 여러분들이 바로 화신불이 되어야한다. 무엇이 화신불이 되어야 하는가. 여러분의 마음 작용이 바로 지금 이 순간에 화신불이 되어야한다. 화신불이 되기 때문에 시자는 시자의 역할로 후원에서는 공양주로 기쁘고 즐겁게 환희스럽게 열어나간다. 승가에서 이렇게 살았던 대표적인 분이 덕산·설봉스님이다. 설봉스님이 덕산스님 회상에서 있으면서 은사인 덕산스님 처럼 복을 지어야겠다 해서 주지이면서도 대중들을 위해 쌀을 씻고 자기는 시궁창에 있는 것을 꺼내서 밥을 끓여 먹었다. 이를 안 주지 스님이 안타까워 하니 설봉은 그동안 혜(慧)만 닦을려고 욕심을 냈지 대중을 위해 복을 짓지 못했다. 이 엄청난 대중들을 외호하는 힘은 복을 지어 얻는 청복(淸福)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겠다 싶어서 후원일을 자청했다. 그로부터 승가에서는 설봉스님을 공심의 표상으로 삼고 있다. 이것을 대승불교에서는 무주상보시라 한다. 무주상보시가 바로 이런 모습이다.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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