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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법이야기

[스크랩] 습은 있는게 아니라 길 들어진 것이다

 이제 이미 스스로 삼신불(三身佛)에 귀의하였으니, 선지식들과 더불어 네 가지 넓고 큰 서원을 발하리라. 선지식들이여, 다 함께 혜능을 따라 외울지니 ‘무량한 중생 다 제도하기를 서원합니다. 무량한 번뇌 다 끊기를 서원합니다. 무량한 법문 다 배우기를 서원합니다. 위없는 불도 다 이루기를 서원합니다.’”(이상 세 번 부름)

“선지식들이여 무량한 중생을 맹세코 다 제도한다 함은 혜능이 선지식들을 제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의 중생을 각기 자기 몸에 있는 자기의 성품으로 제도하는 것이니라. 어떤 것을 자기 성품으로 스스로 제도한다고 하는가? 자기 육신 속의 삿된 견해와 번뇌와 어리석음과 미망에 본래 깨달음의 성품을 스스로 가지고 있으므로 바른 생각으로 제도하는 것이니라”이라고 했다.

본래 우리 본성이 수월도량으로 깨끗하지만 여기에도 미망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미망이 있다고 집착해서도, 없다고 단견에 빠져서도 안된다. 있다고 하면 있는 것은 끊을 수 없기 때문에 단견에 빠지게 되고 본래 부처인데 없다고 하면 부처가 될 수가 없기 때문에 이 역시 단견이다. 업이 어떤 개체성이나 실체가 있는 존재로 대하면 실체가 있기 때문에 없앨 수가 없다. 

  
 

그래서 <화엄경>에서 있다는 단견도 없다는 단견도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화엄경> 이야기가 다 이와 관련된 것이다. 이 사상의 바탕은 연기법이다.

실상이 이런데도 우리가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앞에서도 계속 강조했지만 습 때문이다. 새장의 새를 예로 들면 새는 원래 창공을 거침없이 자유롭게 나는 본성 속성을 가지고 있으나 새장에 가둬 먹이를 주고 길들이면 그 본성을 잃게 되고 나중에 날려보내더라도 도로 새장으로 돌아온다. 이것을 습이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습은 있는 것이 아니라 길들여진 것이다.

이 습을 대처하기 위해서 자꾸 제대로 된 공부, 중도 정견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습의 문제는 생활 속 이 공간에서 해결해야 한다.

한국불교에 잘못된 점 하나가 있는데 좌복 위에 앉아 하는 공부만 공부로 안다는 점이다. 자기 생활 속에서 공부가 되어야하는데 선방에 가서 좌복 위에 앉는 것만 공부로 안다. 스님들도 봉사 같은 것은 공부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좌복 앉는 시간만 공부되는 ‘좌복공부’가 돼서 생활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진다. 그래서 뭘 물어보면 마음에 변화가 전혀 없다보니 행동의 변화가 없고 행동이 되지 않으니 도인의 풍모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이미 바른 생각인 반야(般若)의 지혜를 깨달아서 어리석음과 미망을 없애버리면 중생들 저마다 스스로를 제도하는 것이니라. 삿됨이 오면 바름으로 제도하고, 미혹함이 오면 깨달음으로 제도하고, 악함(惡)이 오면 착함(善)으로 제도하고 번뇌가 오면 보리(菩提)로 제도하나니, 이렇게 제도함을 진실한 제도라고 하느니라.”

지금까지 공부를 통해 법성의 원리가 어떤 것이 알았다. 그런데 이것은 기본이다. 기본이기 때문에 따로 자세하게 말하지 않고 단순하게 말해 ‘염불하는 자는 나무아미타불 불러라. 화두 드는 자는 의정을 일으켜라’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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