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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법이야기

[스크랩] 사유를 통한 적극적 자세

 

불교 근본사상 농축시킨 한마디 ‘원력’

본래 구족하나 노력·실천해야

중요한 것은 중도 정견을 제대로 알고 원력을 내 실천하는 것이다. 백번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는 것이 원력이다. <육조단경> 뿐 아니라 경전 어디든 원력은 반드시 들어가 있다. <법화경 약초유품>에 보면 원력에 관한 4가지 서원이 나오는데 첫째, 해탈하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결정코 그를 해탈케 하겠노라. 둘째, 부처님의 바른 정법 정견을 모르는 사람에게 바른 정법 열반의 묘심을 기필코 알게 하겠다. 셋째, 마음이 괴롭고 고통스럽고 행복하지 못한 이가 있으면 결정코 행복하게 하겠다. 넷째, 열반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열반에 이르도록 하겠다 등 4가지 서원이다. ‘보현행원품’이나 ‘여래십대발원문’ 등 많은 경전에 행원이 나오는데 이를 관념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철학적으로 의미를 새기면서 그냥 넘어가는데 그건 잘못된 태도다. 경전의 말씀을 실천 구도법으로 끌어들여 실천수행법으로 삼은 것이 사홍서원이다.

왜 원력에 대해 할 이야기가 많고 거듭 강조하는가 하면 원력은 철학적 개념에서 이해할 것이 아니다. <단경>에서 말하는 무상 무념 무주 마하반야바라밀 이런 사상들이 모두 녹여서 잘 만들어진 단어가 ‘원력’이다. 그래서 이 원력이 수행에서 절대적이다.

원력이 왜 중요한가. 공부의 목적은 공공적적 소소영영한 공적영지의 무심의 자리를 보기위해서이다. 즉 공부라는 것은 결국 내 마음을 잘 관찰해서 마음의 속성, 원리, 마음이 존재해가는 법칙을 잘 관찰해 가는 수행이다. 공부가 깊이 들어가다 정견 종지를 모르면 자기 나름의 판단에 따라 공부 중간 쯤에서 자리를 잡는 사람이 나온다. 중도하차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부의 깊이에 따라 성문 연각 벽지불 보살 최상승의 불법승이 있는 것이다.

<원각경> ‘보각보살장’에도 ‘수행에서 가장 어렵고 조심해야 할 병 4가지’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나온다. 첫째는 작병(作病)이다. 본래 자성 법성 자리는 청정한 부증불감(不增不減), 즉 더 할 것도 없고 덜할 것도 없는데, 완성되어있는 본성을 잘못 알고 자꾸 식(識)으로 분별을 지어 그것에 의해 다듬어 지고 가지를 쳐서 만드는 청정이 있다. 그렇게 해서 원각을 이루려는 자가 있다. 원각은 본래 지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모르는 자가 짓는 것을 작병이라고 한다. 

  
 

두 번째는 임병(任病)이다. 본래 자성 자리에는 청정한 그 자리에 항하수의 모래만큼 많은 법성이 원래 갖춰져 있다. 법성은 법성에게 맡기면 법성이 잘한다, 우리의 주인공에게 주인공이 하자는 대로 맡겨라, 맡기면 모든 것은 주인공인 원적의 모양 그대로 돌아간다, 원각을 그런 식으로 이루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임병이 든 것이다. 원각은 구족공덕성을 갖추고 있지만 맡긴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노자 도덕경의 무위자연의 무위와 불가의 무위법은 다르다. 세 번째 지병(止病)이다. 원래 번뇌 망상 자체가 일어나도 실체가 없는 것이라서 그냥 끊어 버리면 된다, 그렇게 해서 지독한 단견에 빠지는 사람이 있다.

<육조단경>에도 100가지 생각을 끊어서 법신을 보려 하지 말라 했는데 끊어서 얻으려는 것을 지병이라 한다. 네 번째 멸병(滅病)이다.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연생연멸하므로, 모든 것이 멸해 버리면 천지가 다 일심으로 평등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평등 그것이 원각이라며 거기서 멈추는 것이 멸병이다.

대승경전에 이런 말들이 다 나온다. 경전을 공부할 때 부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했는가를 늘 사유해야 한다. 그냥 이런 것이 있구나 하며 예사로 넘기지 말고 수행자는 늘 사유해야 한다. 왜 이런 말씀을 했을까 하고 자기 심성을 관조하면서 법계의 세계를 체험하며 만들어 내야 한다. 상 차려 주면 먹는 것만 먹는 수행 생활을 하면 안된다. 하나를 들어도 왜 이런 말이 나왔는지, 이런 말이 나왔을 때는 많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나왔는데 나는 이걸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사유해야 한다.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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