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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이야기

[스크랩] 몸 에서 해탈하자

 

관찰하면 내 것이라 할 수 없어

자유로워야 옳은 일 할 수 있다

 

몸이란 어떤 것일까요? “덧없고 힘드니, 병과 같고 고름이 꽉 찬 종기와 같다. 더러운 것이 가득해서 아홉 구멍으로 늘 흘러나오니, 이 몸은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변소(行厠)다.”<대지도론>제19권.

좀 망측하지만, 틀린 말도 아닙니다. 몸에 대한 비유는 또 있습니다. 즉, 몸은 바퀴가 둘 달린 수레라는 것입니다. 지난 생에 이런 저런 사연으로 업을 지은 것이 한쪽 바퀴라면, 이번 생에 씻기고 밥 먹이고, 옷 입히고, 쉬게 해주고, 약을 먹이고, 아름답게 꾸미고 치장한 바로 이 몸이 또 다른 한쪽 바퀴입니다.

이렇게 두 개의 바퀴로 이루어진 수레는 소가 끌고 갑니다. 그 소는 바로 ‘식(識)’입니다. “두 세상의 인연으로 몸이라는 수레가 이루어졌고, 식(識)이라는 소에 끌려서 이곳저곳을 오가는 것이 우리네 몸이다”라고 <대지도론>에서는 말합니다.

게다가 몸은 4대라는 물질적 요소가 화합해서 이루어졌는데, 그것들은 견고하지 않고 늘 인연 따라 모였다 흩어지게 마련인지라, 그런 4대로 이루어진 이 몸도 덧없어 오래지 않아 무너집니다. 덧없이 모였다 흩어지는 모습이란 꼭 물거품과 같습니다. 그래서 대지도론에서는 “이 몸은 물거품과 같아 허망하여 견고하지 않다.”라고 말합니다. ‘이 몸’이라고 할 때의 그 ‘몸’이라는 상(相)은 빈 것으로, 허망한 인연으로 생겨난 것이니, ‘이 몸’은 임시로 있는 것(假有)이요, 과거생에 지은 업의 인연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몸이란 이런 것이니 보통의 중생이라면, “어차피 몸이란 건 부서지게 마련이야. 그러니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이 몸의 매력을 맘껏 뽐내고 즐기자”라고 할 수도 있고, “아무리 그래도 하나 밖에 없는 내 몸인 걸. 그러니 몸을 아끼고 이 몸을 잘 대해줘야 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당신이 보살이라면 좀 다르게 생각해야 합니다. 즉, 보살마하살은 다시 이렇게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몸과 목숨을 아끼지 말자. 왜냐고? 몸을 두루두루 훑어보며 관찰해본 결과 이 몸은 ‘나’라고 할 만한 것도 없고(無我) 내 것이라 할 수도 없기(無我所)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 몸은 빈 것(空)이다. 빈 것이기 때문에 남자니 여자니 하는 온갖 상들은 없다(無相). 상이 없기 때문에 뭘 하거나 원할 것도 없다(不作願).”

이렇게 자기 몸을 두루 관찰한 뒤에 몸에 대해 빈 것이요, 상이 없고, 지을 것이 없음을 터득하는 것이니, 공(空)과 무상(無相)과 무작(無作 또는 無願)이라는 세 가지 해탈문이 열리게 됩니다.

<대지도론>제19권 앞부분에서는 성문의 단계에서 신념처(身念處)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몸이 얼마나 덧없고, 더러운 것인지 면밀하게 관찰하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성문의 신념처가 몸의 덧없고, 괴롭고, 무아라는 상태를 관찰하는 것에서 멈추었다면, 보살은 그렇게 관찰한 뒤에 다시 사색을 밀고 나갑니다. 그래서 이 몸에 대해 앞으로는 어떤 생각의 단계에 머물러서 행동할 것인지를 제시합니다. 그 생각의 단계라는 것이 세 가지 해탈문입니다.

해탈은 속박에서 풀려나는 것입니다. 자유로워진다는 말입니다.

몸에 대해 관찰하고, 세 가지 방면으로 해탈하면 이젠 몸에 대해 자유로워지며, 그런 사람만이 세상을 향해 옳은 일을 거침없이 할 수 있다는 뜻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관찰만 하며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뭔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보살의 37조도품은 이런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37조도품 각 항목에 공과 무상과 무작이라는 세 가지 해탈문이 늘 따라다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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