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은 잘 관찰해 구분하기
착각의 즐거움은 진짜아냐
몸을 지니고 있다는 자체가 우리에게는 힘이 듭니다. 그 몸은 늘 뭔가 먹여주고 씻겨주고 보살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봤자 세월이 흐르면 늘어지고 처지고 힘이 빠지고 병이 드니 몸이란 녀석은 배은망덕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몸이 이렇다는 사실을 관찰하는 것 즉 신념처 관찰을 마치면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생각하라고 <대지도론>은 권합니다.
“중생은 무슨 까닭에 이 몸을 탐하고 집착하는가? 즐거운 느낌 때문이다. 여섯가지 감각기관(6근)과 그에 대한 여섯가지 대상(6경)이 어우러져 여섯가지 식별(6식)을 일으키는데, 여섯가지 식별에서 세 종류의 느낌이 일어난다. 즉 괴로운 느낌, 즐거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이 가운데 즐거운 느낌은 모든 이들이 바라는 바요, 괴로운 느낌은 모든 이들이 바라지 않는 바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취하지도 버리지도 않는다.”(제19권)
몸(身)에는 언제나 감각, 느낌(受)이 일어나니, 이제 신념처에 이은 수념처(受念處) 설명으로 들어갑니다. 수(受)는 느낌입니다.
즐거움, 괴로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무덤덤함. 이 세 가지 느낌 가운데 괴로운 느낌은 누구나 꺼리고 즐거운 느낌을 원하는 것은 생명체라면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극악한 범죄자에서 출가수행자에 이르기까지, 천상의 신들이나 인간 및 꿈틀거리는 벌레에 이르기까지 즐거움을 좋아하지 않고 괴로움을 꺼리지 않는 이는 없습니다. 문제는 저들이 현실에서 추구하는 즐거움이란 것이 진정한 즐거움이 아니라 실은 괴로움이 조금 줄어든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인데, 그걸 즐거움이라 착각하고 움켜쥐고 영원히 그 즐거움이 머무를 것이라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대지도론>을 잘 읽어보면, 즐거움을 쫓아다니는 것 자체를 멈추라는 말은 없습니다. 즐거움을 원하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토록 찾아다녔던 그 즐거움이란 것이 진짜 즐거움이라 할 만한 것인가 생각해보라고 권합니다. 진짜 즐거움이라 할 만한 것은 전혀 알지도 못한 채 뭔가 착각을 해서 엉뚱한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건 아닌지 살펴보고 반성하라고 당부합니다.
<대지도론>(제19권)에서 들려주는 즐거움과 착각의 관계에 대한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혜가 없어 착각하고 헷갈린 바람에 열반이 영원히 즐거운 곳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구나!”
“그러니 이른바 수행을 한다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즐거움이라 여기는 것을 잘 관찰해서 이것은 진짜 즐거움이 아니요, 그저 괴로움 덩어리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참다운 즐거움이라 이름 붙이려면 착각(顚倒)이 없어야 하는데, 세상 모든 이들이 느끼는 즐거움은 전부 착각에서 일어났으니 진짜 즐거움이 아니다.”
“즐거움이 줄어든 것을 이름하여 괴로움이라 하니, 마치 꿀 한 말을 대해에 던져 넣으면 꿀맛은 사라지고 짠 맛만 느껴지는 것과 같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즐거움에 대해 후하게 점수를 주지 않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추구하는 즐거움이란 것이 덧없는 것이란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아일랜드 작가인 오스카 와일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에는 두 가지 비극이 있다. 하나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것을 얻는 것이다.”
원하는 것을 얻으면 즐거우리라 생각하지만 죽을 때까지 원하는 것을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설령 다 갖는다 해도 그것으로 “이젠 됐다”며 흡족하고 즐거워할 사람은 없다는 사실, 중생이 추구하는 즐거움이란 녀석의 정체는 바로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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