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어느 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무척이나 가난했던 시절, 절도 가난했습니다. 주지 스님이 쓰러져 가는 법당에 들어서자 부처님이 빗물에 얼룩져 보기가 흉했습니다. 그래서 개금불사를 발원하고 잠이 들었는데 그날 밤 꿈에 부처님이 나오셔서 말씀하시길 “첫 번째 만나는 이가 화주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스님은 이른 아침 바랑을 메고 나섰는데 마을 어귀에서 노파를 만났습니다. 스님은 노파에게 다가가 합장하고 자초지종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노파는 조상대대로 내려온 가보와 시집 올 때 가져온 패물을 내놓으며 개금불사를 돕겠다고 했습니다. 무사히 불사를 마치고 회향법회를 하였는데 법당에서 노파가 일어서지 못하고 쓰러졌습니다. 앉은뱅이가 된 것입니다.
몇 해가 흘러 스님은 비가 새던 법당 기와를 바꾸기로 했습니다. 이번에도 꿈에 부처님이 나오셔서 “첫 번째 만나는 이가 화주를 할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개금불사에 참여했던 노파가 방문을 열고서 지나가는 스님에게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스님은 ‘아차’ 했지만 그 노파가 처음 만나는 이였습니다. 또다시 자초지종을 말하니 노파가 장롱을 열고 집문서를 내놓는 것이었습니다. 번와불사를 회향하던 날, 이번에는 노파가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또 다시 몇 해 후에 요사채 불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꿈에 부처님이 현몽하셔서 “첫 번째 만나는 이가 화주가 될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스님이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로 멀리 떠나고자 길을 나섰습니다. 인연은 피할 수 없었나 봅니다.
집을 판 노파가 자기 밭에서 기거하면서 일을 하다가 스님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인사를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사정이야기를 하자 노파는 마지막 남은 밭까지 팔아 불사에 보탰습니다. 그런데 요사채 불사를 마치고 회향하던 날, 노파는 호랑이에게 물려가고 말았습니다. 호환을 당한 것입니다.
그날, 스님은 도끼를 들고 법당에 들어갔습니다. “개금불사 하고 앉은뱅이가 되고, 기와불사 하고 소경이 되고, 요사채 불사를 하였는데 호환을 당하다니 그러고도 어찌 부처라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불상을 도끼로 찍었습니다.
스님은 바랑을 메고 길을 떠났습니다. 20여 년이 흐른 후 스님은 돌고 돌아 옛 절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절에서는 새로 부임한 젊은 신임 사또의 칠일기도가 끝나는 날이었습니다. 법당을 열고 들어가니 여전히 불상은 도끼가 박혀있었습니다.
스님과 사또가 도끼를 뽑자 도끼날에 ‘화주와 시주가 오늘 이 자리에서 만나다’는 글귀가 새겨져있었습니다. 신임 사또가 바로 전생에 개금불사, 기와불사, 요사채 불사를 시주한 노파였던 것입니다. 노파는 보시를 통해 삼생동안 받아야 할 죄업을 한꺼번에 받고 귀한 가문에 태어나 약관의 젊은 나이에 장원급제하여 금의환향한 것입니다.
땅에서 넘어졌으면
땅을 딛고 일어서라고
했습니다
최선을 다해 사는 오늘은
내 삶에서 가장 행복하고
소중한 날이 되지만
게으름 피우며
무의미하게 보내버린 오늘은
불행과 후회를 낳는 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은 스스로를
‘정진론자’라 할 만큼
정진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정진종교’라고 부를 만합니다
오랫동안 구전되고 있는 이 설화는 오늘을 사는 불자들의 마음가짐을 되새기게 합니다. 지금 당장 무언가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남을 원망하거나 불보살님을 원망하는 어리석은 불자가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인과(因果)란 한 치의 오차 없이 분명하다고 하셨습니다. 살다보면 나쁜 짓을 하는데 잘 먹고 사는 이들을 봅니다. 좋은 일을 하는데 사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이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 업(業)의 씨앗이 영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금생에 받지 않으면 다음 생에 언제든 그 과보는 받게 됩니다.
모두들 요즈음 세상살이가 무척 힘들다고 합니다. 이럴 때 일수록 불제자라면 한시라도 수행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날은 바로 ‘오늘’ 입니다.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그 많은 시간도 결국 ‘오늘’의 연속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거는 수많은 오늘의 그림자요, 미래는 다가올 오늘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바로 오늘, 그 중에서도 지금입니다. 하루하루를 삶의 전부로 느끼며 최선을 다해 사는 오늘은 내 삶에서 가장 행복하고 소중한 날이 되지만, 게으름 피우며 무의미하게 보내버린 오늘은 불행과 후회를 낳는 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승보종찰 송광사 16국사 가운데 제1세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계셨던 고려의 사회는 참으로 혼탁했습니다. 당시 불교계는 선(禪)과 교(敎)가 서로 비방하고, 세상 사람들은 본분을 지키지 않고 명예와 이익만을 추구하는 어지러운 세계였습니다.
이때 지눌스님은 수행자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선포하셨습니다. 스님은 한국불교의 큰 흐름을 만들어놓은 정혜결사를 시작하면서 공포한 결사문에서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선다”고 전제하고 “땅을 떠나서 일어나려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아무리 험난하고 절망적이라 해도 해결의 실마리는 넘어진 그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회피하거나 돌아갈 것이 아니라 지금 처한 상황에서 이를 딛고 일어서야합니다. 넘어진 그곳이 희망이 시작되는 자리인 것입니다.
실패를 거듭하면서 그 교훈을 생각해 보지 못한다면 그 실패는 단지 실패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실패를 디딤돌 삼아 다시는 같은 실패를 거듭하지 않는다면 그 실패는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고난과 고통도 이곳에 있지만 이곳이 바로 희망과 행복이 시작되는 터전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현재 자신이 있는 곳보다 다른 곳에 가기를 원합니다. 집에 있을 때엔 바닷가에 가고 싶어 하고, 바닷가에 있을 땐 다시 편안한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마치 무지개라는 행복을 찾아 먼 곳을 헤매는 어린 아이들처럼 말입니다. 행복을 찾아 먼 곳을 헤매고 다니지만 정작 그 행복을 찾아서 평정과 고요를 얻은 사람이 드문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건 엉뚱한 곳을 찾아다니기 때문입니다.
세속적 성공과 물질적 풍요와 부로는 행복을 살 수 없습니다. 물론 기본적인 민생고를 해결해야 다음단계로 행복을 추구하는 욕구가 생기기 마련이니 물질적인 관점이 나쁘다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고통이라고 느끼며 불만족한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즉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이 내면의 변화를 갖도록 해야 합니다.
자기 주변에 머물고 있는 모든 것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나를 기쁘게 해주는 사랑스런 가족들의 얼굴을 생각해야합니다. 또한 마음속에 늘 당연시 했던 타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기억해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했던가를 느껴보십시오. 행복은 그렇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했습니다. 행복해지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우리는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배움에는 끝이 없습니다. 특히 마음을 다스리는 부처님 공부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불교를 흔히 은둔 종교, 허무의 종교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교를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불교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희망을 만드는 종교입니다. 부처님은 스스로를 정진론자(精進論者)라고 하실 만큼 정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정진종교’라고 부를 만합니다.
불교는 신의 구원이나 우연을 근본적으로 배격합니다. 불교는 인간 스스로의 끊임없는 수행으로써 깨달음을 얻고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의 구원을 바라며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도, 우연히 구원이 있기를 바라며 기다리는 것도 정진이라고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를 구원해야 한다는 것은 결국 노력 없이는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는 그 순간까지도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모든 것은 변해 가나니, 게으름 없이 힘써 정진하라”고 당부하셨던 것입니다.
중생의 괴로움이 비록 진리에 대한 무지에서 생기지만, 진리에 대한 무지마저도 초극할 수 있는 것이 정진의 힘이기에, 중생의 괴로움을 초래하는 더 큰 원인은 게으름이기에, 부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정진하라”는 가르침을 우리에게 남기신 것입니다.
이제 결실의 계절, 가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잘 영글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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