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불교이야기

[스크랩] 공은 허무 주의인가

 

어느 사찰에서나 법회는 <반야심경(般若心經)> 독송으로 시작된다. <반야심경>은 대승불교의 핵심 개념인 공(空)의 의미를 담은 경전이다.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에서 건너느니라” 곧 공에 대한 통찰이 참다운 행복을 얻는 관건임을 일러주고 있다.

“오온이 공하다”는 구절은, 인간의 분별과 판단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시사한다. 모든 생명은 사대(四大)와 오온(五蘊)으로 구성된다. 사대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으로 물질적 질료를 일컫는다. 아무리 멀쩡한 몸이라도 사대가 흩어지면 존재는 속절없이 소멸한다.

아울러 색(色, 물질) 수(受, 인지) 상(想, 표상) 행(行, 의지) 식(識, 분별)으로 이어지는 망상의 메커니즘이 오온이다. 여자는 애당초 한낱 몸뚱이일 뿐이지만, 오온 때문에 젊고 예쁜 여자가 되고 그래서 갈증을 유발한다.

만물의 순환과 흐름에 대한 사유

절망 속에서 희망 볼 줄 아는 지혜

세월이 흘러 꼬부랑 할머니가 되면, 그 여자가 미인이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는다. 이것에 매몰되면 저것에 몽매해지는 법이다. 모든 것은 돌고 돈다는 순환적 사고에 익숙해지면, 집착하지 않을 수 있고 오판하지 않을 수 있다.

공의 한자적 어의는 ‘비어있음’이다. 나아가 비어있음이 덧없음으로 의역되면서, ‘불교는 비관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종교’라는 편견을 낳기도 한다. 그러나 공은 엄밀히 이야기하면 ‘비어있다’가 아니라 말 그대로 ‘공하다’는 뜻이다.

슬픔에 파묻히는 것이 아니라 슬픔 속에서 기쁨을 볼 줄 아는 ‘흐름’에 대한 사유다. 절망의 뒷면은 희망임을 알고 정진하는 삶이다. 단순히 긍정이나 용기를 두둔하는 덕담이 아니다. 세상 이치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공은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로서의 자성(自性)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오직 인연에 따라 생겨났다가 사라질 뿐이며, 주어진 조건에 의해 단지 그렇게 보일 따름이다. 그래서 공은 연기(緣起)의 다른 말이다.

예컨대 내 눈을 통해서만 꽃은 비로소 나타난다. 인간에게 바다는 물이지만, 물고기에게 바다는 삶의 터전이다. 피아노의 음색이 아무리 아름답다손, 침묵이라는 기반이 조성되지 않는다면 소리도 발붙일 곳이 없어지는 것이다. 빛과 그림자는 한 몸이다.

공의 원리에 따라 만물은 끊임없이 유전한다. 가을바람에 나무가 자신의 맨몸을 드러낸다는 체로금풍(體露金風)의 계절이다. 수많은 나뭇잎으로 풍성한 여름날의 나무가 색(色)이라면, 겨울 들녘의 앙상한 나목(裸木)은 공(空)이다. 다시 봄이 오면 온 산하는 색으로 물든다.

그래서 색즉시공(色卽是空)이고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색 안에 공이 있고 공 이 색을 움틔우는 것이다. 울창한 나무도 벌거벗은 나무도 나무의 실상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당장 힘들다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아니며, 잠깐 즐겁다고 영원히 즐거울 순 없는 노릇이다.

공에 대한 성찰은 균형 잡힌 생각을 돕는다. 결국엔 잘못된 생각으로 인생을 그르치지 않게 해주는 버팀목이다. 중국 남북조시대 승조스님은 주변의 모함으로 참수를 당하면서 유명한 열반송을 남겼다.

“사대가 원래 주인이 없고 오온이 본래 공하다. 번쩍이는 칼날에 머리를 내미니 마치 봄바람을 베는 것 같구나.”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혹형을, 봄날의 꽃놀이쯤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지금 내가 죽더라도 언젠가는 또 다른 나로 태어나리란 확신의 표현이기도 하다. 공을 체득한 자의 마음은 이토록 당당하고 또한 자유롭다.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메모 :